사람은 저마다 유년의 한 장면을 품고 평생을 살아간다. 내게 ‘옷차림’이란 단어가 단순한 수식을 넘어 하나의 깊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강바람이 매섭게 불어오던 강화도의 검붉은 흙냄새 속에서였다.
당시 우리 가족의 삶은 온통 논밭에 박혀 있었다. 부모님의 일상은 새벽이슬을 밟으며 시작해 어둠이 내릴 때에야 비로소 끝이 났다. 억센 들판에서 흙을 일구고 밭이랑 사이를 오가던 부모님의 바짓단에는 늘 검붉은 흙이 문신처럼 배어 있었다. 그것은 정직한 땀의 흔적이었으나, 동시에 고단한 시골 살림의 얼굴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모님에게는 결코 무너뜨리지 않는 삶의 경계선 하나가 있었다. 어쩌다 읍내 장터로 나가는 날이나, 마을 밖으로 사람을 만나러 가실 때면 당신들은 어김없이 흙 묻은 작업복을 벗어던졌다. 낡은 장롱 깊숙한 곳에서 꺼낸 옷가지의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손수 다림질해 구김을 편 정장을 그렇게 차려입으셨다.
어린 눈에도 그것은 단순히 남의눈을 의식한 차림새가 아니었다. 거친 노동에 패인 삶일지라도 타인과 세상 앞에서는 스스로를 함부로 굴리지 않겠다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스스로를 함부로 여기지 않으려는 부모님 나름의 예의였다. 부모님에게 옷은 세상 앞에서 자신을 지키는 존엄이었던 셈이다.
그 정장 차림의 엄숙함을 보며 자란 탓일까. 성인이 되고 온라인 게임 생활을 하면서도 나의 옷차림은 부모님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갔다. 집이나 가볍게 산바카라할 때는 몸에 감기는 편안하고 헐렁한 옷을 입었지만, 사람을 대하거나 바카라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나설 때면 어김없이 깃을 세우고 구두끈을 조였다. 나에게 옷은 일상의 편안함과 슬롯적 바카라임이라는 두 세계를 갈라놓는 분명한 국경선이었다.
그 견고하던 나의 기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아내와의 삶이 깊어지면서부터였다. 아내의 옷차림에 대한 태도는 나와 결이 달랐다. 아내는 집 안에서 머무를 때나, 집 앞 마트에 다녀올 때조차 느슨한 차림으로 나서는 법이 없었다. “집에 있다고 너무 몸을 놓아버리지 말아요. 가까운 곳을 가더라도 정갈하게 입어야 마음이 안 풀려요.”
처음에는 그 잔소리가 거북했다. 집이란 지친 몸을 헐겁게 풀어놓는 사적인 공간이 아닌가. 가벼운 외출마저 격식을 차려야 한다면 마음의 숨통은 어디서 트란 말인가. 한동안은 일부러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고집하며 조용한 반항을 시도하기도 했다. 편안함이 으뜸이라는 나와, 일상의 매 순간을 다잡으려는 아내의 마음이 나란히 부딪히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느 비 내리던 주말 아침이었다. 습기 찬 거실 소파에 누워 늘어진 옷차림으로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던 나에게 아내가 다가왔다. 아내는 말없이 잘 정돈된 셔츠 한 벌을 내 곁에 놓아두었다. “그냥 쉬더라도 이렇게 입고 있어 봐요.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니까.”
그날은 그저 못 이기는 척 셔츠를 받아 갈아입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쯤 지나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문득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아내의 말이 어떤 뜻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늘어져 있던 어깨가 조금은 펴져 있었고, 소파 위에서 흐릿하게 풀어지던 마음자리에는 조용한 정돈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부모님에게 옷이 세상 앞에서의 예의였다면, 아내에게 옷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조차 자기 자신을 함부로 놓아버리지 않는 예의였던 것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아내와 나는 인생의 그늘이 깊어가는 노년의 길목에 함께 서 있다. 서로의 얼굴에 늘어가는 주름을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서로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는 일상이 덤덤하게 이어진다. 부모님이 흙먼지 속에서 정장 한 벌로 삶의 품을 지켜내셨듯, 나와 아내가 매일 아침 단정히 옷을 차려입는 일 역시 지나온 시간과 남은 삶을 향해 올리는 조용한 가다듬음이리라.
오늘도 밖을 나서기 전 거울 앞에 선다. 주름진 목선 위로 깃을 올리고 단추를 차분히 잠근다. 잘 정돈된 옷자락을 따라, 오늘 하루 내게 허락된 시간 또한 그렇게 매끄럽고 바르게 정돈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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