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가 울던 골방

by선비천사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을 다 태워 버릴 듯 뿜어져 나오던 폭염이 하룻밤 새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아침 일찍 창문을 열자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공기의 결이 확연히 다르다. 며칠 전 입추를 지나더니, 하늘은 슬그머니 높아지고 베란다 아래 풀숲에서는 낮고 투명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온다. 여름 내내 들끓던 열기가 물러난 자리에, 비로소 서늘한 음영이 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기억은 자연스레 삼사십 년 전, 아직 세상으로 나가지 못했던 스무 살의 골방으로 돌아간다.


낮 동안 길에서 스쳐 간 여자의 샴푸 냄새 하나가 밤까지 따라오던 시절이었다. 손 한번 잡아본 적 없는 나이였으므로, 상상은 늘 현실보다 뜨거웠다. 어디로 쏟아야 할지 모를 혈기가 온몸에 팽팽하게 차올랐고, 밤이 되면 골방은 어김없이 혼자만의 열병으로 가득 찼다.


낮에 입다 벗어놓은 셔츠는 벽의 못 하나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고, 머리맡에는 몇 번이나 펼쳤다 덮은 수험서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다. 낮 동안 무거운 발걸음으로 거리를 헤매다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써도, 끓어오르는 몸의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어두운 방에 모로 누워 홑이불을 걷어차던 밤, 창틀 틈새로 서서히 들려오던 새벽바람과 귀뚜라미 소리는 타오르는 볼과 이마를 식혀 주던 유일한 냉수였다. 차가운 장판 바닥에 이마를 대고 모로 누워, 미칠 것 같던 혈기가 제발 무던해지기를 바라며 밤새 뒤척이던 그 시절의 고독은 날카롭고도 아찔했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외로워서 괴로웠다. 세상에 내 자리는 없는 것 같았고, 몸 안의 열기는 나를 태워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제는 그토록 괴로워할 수 있었던 그때의 내가 조금 부럽다.


열기가 사라진 자리에는 평온이 왔다. 그러나 평온이라는 것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조금 쓸쓸한 것이었다.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귀뚜라미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스무 살의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몸의 열기가 식기를 기다렸다. 지금의 나는 식어가는 계절 속에서 그때의 열기를 생각한다. 사람은 참 이상하다. 뜨거울 때는 식기를 바라고, 식어갈 때는 한때의 뜨거움을 돌아본다.


풀숲의 귀뚜라미 소리가 한층 또렷해졌다. 오래전 그 골방에서도 저렇게 울었을 것이다.


달라진 것은 어쩌면, 귀뚜라미가 아니라 나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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