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도(濕度)의 무게

by선비천사

여름밤의 열기는 방 안의 모든 가구를 눅눅하게 부풀려 놓았다. 에어컨은 낮은 기계음을 내며 차가운 바람을 밀어냈지만, 유리창 바로 건너편에 버티고 선 밤공기는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끈적거렸다.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늘함과 찌는 듯한 습기가 팽팽하게 대립하는 거실. 그 경계선 위에서 나는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을 쓸어 올리는 손가락 끝에 닿는 유리 감촉이 미끄덩거렸다. 알고리즘이 쏟아내는 수천 개 영상의 잔상이 눈동자 위를 스쳤으나 마음 안쪽으로 스며드는 것은 없었다. 화면을 끄자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잔상만 남았다. 소파 저편에는 아내가 모로 누워 있었다. TV 리모컨을 쥐고 있는 아내의 발꿈치는 단단하고 하얗게 갈라져 있었다.


첫 사람을 떠나보내고 기나긴 적막 속에 갇혀 지내다 이 사람을 알게 된 지 어느덧 7년. 조심스레 마음의 문을 열고 한집에 짐을 풀고 온기를 나누기 시작한 지는 3년이 되었다. 서로의 깊은 상처를 가만히 다독이며 살가운 정을 쌓아온, 여전히 고맙고 애틋한 내 사람이다. 다만 푹푹 삶아대는 이 늦은 밤, 무더위와 식지 않는 열기 탓에 서로가 잠시 깊은 무기력에 빠져들었을 뿐이다. 소파 저편에 모로 누워 TV 화면만 바라보는 아내의 등이 오늘따라 유난히 아득해 보였다. 내가 슬그머니 주변을 서성여보아도, 더위에 지친 아내는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한 지붕 아래서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며 살아가면서도, 이렇게 열대야가 찾아온 밤이면 사람은 각자의 고독과 침묵 속으로 잠시 파고들곤 한다.


바카라상 위 노트북의 하얀 백지는 여전히 사막 같았다. 방 안은 축축한 습기로 가득했지만, 모니터 앞에 앉은 내 마음만은 이상하리만치 바짝 말라 있었다. 자판을 누르는 손가락 끝에서 사그락거리는 건조함만 묻어났다. 쓰고 싶은 의욕조차 없이 그저 꺼지지 않는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는 일, 그것은 글을 쓰는 작업이 아니라 스스로의 부재(不在)를 확인하는 일에 가까웠다.


눈은 멀뚱했고 정신은 서늘하도록 또렷했다. 돌이켜보면 일정한 시각에 출근하고 정해진 일과에 삶을 맞추던 시절에는 늘 잠이 고팠다. 아침마다 눈꺼풀의 무게를 견디며 밖으로 나섰고, 주말이면 실컷 잠이나 자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아무런 역할도, 지켜야 할 시간표도 사라진 삶은 생각보다 넓었고 나는 그 안에서 자꾸만 제자리를 맴돌았다.


전화기 속 연락처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화면을 덮었다. 늙어가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낡은 일상을 확인하는 것도, 제 속도로 달려가는 자식들에게 늙은 아비의 허전한 밤을 들키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내 고독을 증명하려 애쓰는 일조차 아득한 노동처럼 느껴졌다.


그때 어둠 속에서 발톱이 장판 바닥을 긁는 미세한 소리가 났다. 강아지였다. 녀석은 어둠을 헤치고 다가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내 발등 위에 둔탁한 머리를 툭 얹었다. 묵직하고 따뜻한 무게. 그곳에는 어떤 기대도, 요구도, 지나간 세월에 대한 셈법도 없었다.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녀석의 억센 털을 문질렀다. 털에 남은 따뜻한 온기가 손끝에 스며들었다. 녀석은 그저 숨을 깊게 내쉬며 제 몸의 무게 전부를 내 발등에 내어주었다.


이 밤의 한증막이 사그라든 것도, 아내의 무심한 등에 온기가 돈 것도, 머릿속의 텅 빈 백지가 문장으로 채워진 것도 아니었다. 내일 아침이 오면 나는 또다시 헐렁하고 싱거운 일상의 궤도 위에 던져질 것이다. 이 고독은 깨달음이라는 매끄러운 단어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삶의 허무는 강아지의 체온 한 조각으로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손끝에 닿는 강아지의 규칙적인 숨소리와 묵직한 체온을 느끼며 나는 가만히 그 자리에 머물렀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 눈을 감지도 않았고, 쓸데없는 교훈을 쥐어짜 내며 글을 포장하려 들지도 않았다. 지나온 삶의 흔적과 풀리지 않는 무기력, 그리고 밤의 적막을 그 무거운 습도 그대로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강아지는 내 발등에 머리를 얹은 채 가만히 숨을 골랐다. 창밖의 습한 밤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여름밤의 습도는 끝내 마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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