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푸리아가 게이치에게 패배했다. 기분이 묘하다.
작년부터 UFC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주요 경기들은 라이브로 챙겨봤고 그 밖의 경기들도 유튜브 하이라이트를 통해 대부분 챙겨봤다. 과격하고 징그러운 것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이 과정이 기이하다고 여겨졌다. 이제 와서는 이 모든 것이 부족한 남성성을 채우려는 나의 부단한 몸부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경기를 보다 보니 몇몇 선수들을 응원하게 되었다. 이 글을 쓰며 내가 어떤 선수들에게 마음을 준 것인지 생각해 보니, 대체로 서사가 있거나 인성이 바른 선수들이다. 그중에서도 토푸리아는 서사가 있는 선수였다. 혜성처럼 등장해 볼카노프스키, 찰스 올리베이라, 할로웨이와 같은 엄청난 선수들을 녹다운시키며 두 체급 챔피언 자리에 오른 선수.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선수에게 눈길이 가는 핵심적인 이유는 다른 부분에 있는 것 같다.
토푸리아는 자기확신이 엄청난 사람이다. 쇼맨십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미래에서 결과를 보고 온 사람처럼 자신의 승리를 100% 확신한다. 언제나 그렇다. 처음에는 많은 격투기 팬들이 토푸리아가 지나치게 오만하다며 욕했다. 하지만 그가 결과로 증명하자 서서히 칭송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이번 게이치와의 경기 전에도 자신의 SNS 계정 프로필을 18:0으로 미리 바꿈으로써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게이치와의 경기 전 그의 전적은 17승 0패였다.) 뿐만 아니라 경기 전 비포(before) 파티라 하여 승리를 미리 자축하는 파티를 가졌는데, 이 또한 굉장히 과격한 퍼포먼스다.
나는 강력하게 믿는 바, 즉 '안다'는 수준으로 확신하는 무언가는 현실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뜬금없이 확신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의 확신에는 화려한 과거 커리어가 뒷받침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자기확신은 커녕 자기의심이 큰 사람으로서 그를 동경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번 경기 전에도 그의 자신감 있는 행보를 지켜보며 이번 경기 또한 지난 경기들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녹다운으로 그가 승리를 거머쥘 것이라 예상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펀치로 게이치를 잠재울까 기대하며 TV 앞에 앉았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1라운드만에 그의 몰골은 처참해졌고 2~3라운드를 거치며 그의 얼굴은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망가졌다. 결국 4라운드가 끝난 뒤 토푸리아의 세컨(코치)이 더 이상 경기를 진행하는 건 선수 생명에 큰 지장이 있을 것이라 판단해 경기를 끝냈다. 격투기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첨언하자면, 토푸리아 쪽이 항복(기권)을 선언한 것이다. 토푸리아는 마지막 라운드인 5라운드까지 강행하고자 했으나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더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침까지는 기분이 괜찮았는데 오후에 토푸리아의 경기를 보고는 갑자기 기운이 쭉 빠졌다. 내가 이만큼이나 그를 응원했나 싶어 어이없는 웃음까지 나왔다. 여러 생각이 든다. 자기확신이 부족했던 것일까? 가슴 한구석에 승리에 대한 일말의 의심을 품고 있었을까? 뭇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가 지나치게 오만했던 걸까? 살다 보면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좀 더 겸손했어야 했던 걸까?
나는 다시 AI에게 묻는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다.
첫째, 내 결핍을 토푸리아가 대신 충족시켜줄 거라 은연중에 기대했던 것 같다. 과도한 자아 의탁이랄까.
둘째, 과도한 자기확신은 이 삶의 주인공이 나라는 강력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고, 동시에 타자는 그 배경에 있거나 아예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토푸리아는 분명 오만했다. 그의 행위는 게이치의 노력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셋째, 확신은 필요조건이 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게이치도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는데, 그럼 하늘은 누구의 말을 들어준단 말인가? 더 간절한 사람? 이건 증명할 수 없을뿐더러 확신 이외에 승리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모든 요소들을 부정하고 있다.
넷째, 자기의심의 반대는 자기확신이 아니다. 자기의심의 반대는 결과물과 상관없는 헌신이다. 결과물이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달리기 시작하는 자기확신과는 그 결이 완전히 다르다.
다섯째, 나는 더 이상 '끌어당김의 법칙'을 믿지 않게 되었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자기의지(자기확신)로 모든 일을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잘 쓰면 분명 삶에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맹목적인 믿음은 한 개인의 자유의지를 과도하게 긍정하게 되며, 이는 필연적으로 타자와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글을 마치며 저스틴 게이치의 챔피언 등극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게이치는 UFC 파이터로서 겪어야 할 모든 일을 겪고 마침내 정상에 오른 사람 같다. 토푸리아에게서는 내 결핍을 봤고, 게이치에게서는 내 지향점을 봤다. 내가 이 경기에서 깨달은 것처럼 토푸리아도 더 강해져서 돌아오길 바란다. 게이치도 한때는 18승 무패 파이터였고, 여러 시련을 겪었으며, 결국 챔피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