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사랑한 적이 없구나

by정현태

https://youtu.be/6lfomaaEzr4?si=Ki14gSbgYj5v91je


오늘 아침 우연히 김주환 교수님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영상의 요지는 '완벽주의는 병이며, 어떠한 일을 잘하고 싶다면 완벽을 좇을 게 아니라 전과정을 즐겨야 한다'이다.


"그래서 어떻게 즐겨야 하는 건데?"


교수님이 무턱대고 모든 일을 즐기라고 말씀하신 건 아니다. 교수님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쉽게 즐기지 못하는 이유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뒤, 만약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모든 일이 일종의 놀이가 된다, 즉 즐길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하신다. 교수님이 전하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분명하지만, 다시 의문을 자아낸다.


"그래서 어떻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건데?"


'실패를 두려워 말라.' 이 말이 진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움은 내면에서 나의 통제를 떠나 피어오르는 감정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척척박사인 AI는 이 물음에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리고 시작된 AI와의 대화 속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깨달을 수 있었다.


1. '두려움 없음'은 태도의 산물이 아니라 조건의 산물일 수 있다. 김주환 교수님은 자신의 슬롯적 위치가 있으니 큰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2. 우리가 실패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본능적으로 자아를 보호하려 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이 두려움이 적거나 없어 보이는 것은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아이들에게는 아직 '지킬 자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즉, 두려움을 경험할 주체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결론에 이르면 우리가 견지해야 할 태도는 분명해진다. 두려워 말라는 명언을 되내일 것이 아니라, 자아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일...


3. 이제 자아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일은 가능한 것이냐는 물음이 생기지만, '특정 사건'의 경우 가능한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면, 하늘이(딸)가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났을 때 나는 그 사건에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시간이 지나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자아의 경계가 뚜렷했다면 계속 부정적인 마음을 품거나 두려워했겠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평온했다. 나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던 거대한 무언가가 숭덩 잘려나가는 기분이었다. 결국 의지보다는 자아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사건'이 중요한 것인가?


4. '그릇이 작다'는 자기 판단에 대한 AI의 답변이 인상 깊었다. AI는 내가 자기중심성에 대해 수없이 언급하는 바카라을 썼으면서 또 자기중심적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뜨끔했다. 그러고 보니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존재 그 자체로 사랑하면서 나 스스로는 있는 그대로 사랑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이 어이없는 역설을 자각하며 앞으로는 나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5. 이제 나 자신 또한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는 결론은 또 다른 물음으로 이어진다. '도대체 어디까지?' 그렇다. 나는 요즘 삶에 대한 동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다. 일을 하기 싫다. 출간된 바카라이 아직 '신간'이라 부를 수 있을 때 조금 더 홍보에 열중하고, 기존에 계획했던 강의를 준비하는 등 노력을 해야 하는데 너무나도 하기 싫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인간처럼 느껴져 꾸역꾸역 무언가를 생산해 보지만, 이렇게 억지로 하는 일이 잘 될 리가 없다. 결과물은 형편없고 되지도 않는 일을 억지로 한 탓에 에너지는 한껏 소진된다. 이제 일하기 싫어하는 이런 나조차 사랑해 주어야 하는가?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음에도 자기 사랑을 이유로 빈둥거림을 허용해야 하는가?


6. 또 막혔다. 나는 자기 사랑을 어떤 한계 속에 가두고 있었다. 하늘이를 받아들일 때 내가 한계나 조건을 붙였던가? 어디까지 사랑해야 할지 한계를 정하지 않았다. 그저 감사했을 뿐이다. 내가 사용한 단어 '빈둥거림 허용'에서 나는 이미 사랑을 잘못 정의하고 있다. 빈둥거림 허용은 마치 '방임'처럼 들린다. 사랑은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것이지, 방임이 아니잖는가? 나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지, 삶의 동력이 왜 이토록 떨어질 수밖에 없는지를. 그것이 진정한 자기 사랑이다.


7. 이제 마음의 심연까지 내려온 느낌이다. 언제나 열정적으로 살았던 내가, 가야 할 길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내가 왜 이렇게 주저앉아 있는가. 어쩌면 나는 지친 것일 수도 있겠다. '나의 길'을 걸어왔다가 하나 그 뒤에는 언제나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 같다. 증명하려는 삶. 이건 '나아감'이라기보다는 '도망침'에 가깝다. 지난 10년간 도망치면서 얼마나 지쳤을까. 나 자신에게 깊은 연민을 느낀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정말 오랜만에, 어쩌면 태어나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가여움을 느낀다. 나는 이제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한다. 기간도 한계도 정해놓지 않는다. 언제나 타인과 미래를 향해 있던 시선을 나 자신과 현재로 옮겨온다. 지금 여기에서 나는 부족함 없이 온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나는 충만한 나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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