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하여
마음은 가만히 두면 나의 통제를 떠나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지껄인다. 내면세계가 평온할 때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때라면 상당히 시끄럽다. 그래서 마음이 번잡할 때는 몸을 최대한 많이 움직여야 한다. 솔직히 이런 때 몸을 움직이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어찌저찌 작은 의지를 피워내 신발끈이라도 묶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확률이 높아진다.
새벽 5시, 딸이 깼다. 아침잠이 없는 내가 먼저 일어나 딸을 돌본다. 갑자기 모든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강렬한 부정성... 나는 분명 삶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이런 일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경험했기에 이제는 그 느낌에 휩쓸리기보다 한 발자국 떨어져 관조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힘든 건 매한가지였다. 나는 갑자기 무엇이 그렇게 버거웠던 걸까. 하고픈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것에서 오는 조급함과 지난주 금요일부터 아프기 시작해 자꾸만 보채는 딸... 내 바카라에서 언급했듯 '자기중심성'이 비대해지면 삶이 고달파진다.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면 소통(생각과 감정)은 지난 과거, 어쩌면 태초부터 쌓아온 업에 의해 펼쳐지는 것이기에 쉽사리 통제할 수 없다.
무엇이 불편한지 자꾸 보채는 딸과 씨름하다 보니 아내가 깼다. 나의 좋지 않은 감정 상태를 아내에게 빨리 알려 도움을 청한 뒤 침대로 향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잔인하게도 그 모든 것에는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랑을 설파하는 사람이 가족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은 지나친 역설이다.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나의 캄캄한 그림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사랑을 택하는 나의 모습에 누군가는 열광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다시 침대로 도망쳤다. 그 사이 아내는 묵묵히 딸을 돌봤다. 아내는 말을 아꼈지만 분명 마음으로 나를 응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캄캄한 곳에서 최대한 빨리 빠져나오라고.
오후에는 딸의 병원 일정이 있었다. 병원 일정을 마치고 집에 와 점심을 차려 먹을까 하다가 아내가 너무 힘들 것 같아 어제 먹다 남은 피자를 데워먹자고 했다. 삶의 부정성이 극에 달했지만 피자는 분명 맛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내에게 쉬라고 일러둔 뒤 강아지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귀찮기도 했지만 부정적인 마음의 작동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평소 걷던 산바카라로가 있었지만, 조금 더 초록하고 조금 더 해가 잘 드는 곳으로 가고 싶어 집 앞 하천으로 향했다.
그렇게 한참 걷고 있는데 멀리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할아버지께서 길을 잃으셨다며 도움을 구하고 계셨다. 집이 어디신데요 하고 물으니 산울동이라 하시기에 핸드폰을 꺼내 지도앱을 켰다. 집까지 30분은 걸으셔야 했는데 나이가 지긋하시기도 하고 무거운 짐까지 들고 계셔서 걱정이 앞섰다. 무엇보다 날이 너무 더웠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역시 차로 모셔다드리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걸어가면 그늘이 잘 드리운 벤치가 있었기에 할아버지와 같이 걸었다.
"선생님, 여기서 잠시 쉬고 계시면 제가 금방 올게요. 집이 근처거든요. 차로 모셔다드릴게요."
할아버지는 괜찮다며 길만 알려달라고 하셨지만 나는 손사래를 치며 집으로 향했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집에 도착한 나는 차 키를 챙겼다. 날이 더워 삐질삐질 땀이 나는 와중에도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그리 기뻤다.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신 곳에 도착하니 저기 멀리 할아버지가 벤치에 점잖이 앉아 쉬고 계셨다. 성큼성큼 다가가 먼저 할아버지의 짐을 챙겼다. 트렁크에 짐을 대충 욱여넣고 할아버지를 조수석으로 모셨다. 할아버지 집으로 향하는 길, 차 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땀이 마르며 내 마음을 가득 메운 어둠도 조금 옅어지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를 집 앞까지 모셔다드리니 할아버지는 기름값을 주겠다며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셨다. 나는 다시 손사래를 치며 건강하시라는 말을 남긴 채 도망치듯 차로 돌아왔다. 바퀴는 움직이기 시작하고 백미러로 할아버지를 보는데 내게 손을 흔들고 계셨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정말 이상하다. 도운 건 난데 왜 이렇게 위로가 되는 것인지...
하나님은 또 이렇게 사랑의 기쁨을 알려주신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고, 그리하면 나 또한 사랑으로 채워질 것이라고... 정말이지 모든 것이 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