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 남편과 역귀성하고 딸들 가족과 보낸 느낌 소감
따르릉!!
둘째 딸 전화다.
"엄마, 이번 추석엔 군산 못 내려갈 것 같아요. 시댁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오신다고 하네요."
딸의 시부모님도 우리 부부와 같은 연배다. 그 댁 자녀들도 서울에 셋이 살고 있으니 두 부부가 서울로 올라오시면 자녀들이 모두 모일 수 있어 다른 가족이 고생을 덜 할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추석엔 나도 역귀성을 해 보면 어떨까?'
셋째 딸과 톡을 주고받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드디어 결정을 했다. 이번 추석에는 우리가 서울로 올라가기로. 그런데 남편이 문제였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큰집 형님 부부가 살아 계실 때는 삼 형제 가족들이 명절이면 한자리에 모여 제사 음식 준비를 하고, 제사도 함께 지내며 산소에도 함께 다녀왔다. 결혼 후 58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어온 집안 문화였다. 이를 한 번도 어긴 일 없이 이어왔다.
그런데 세상은 변했다.
몇 년 전, 코로나가 찾아왔고, 형님네 부부가 세상을 떠나신 후 오랫동안 이어오던 명절 제사도 멈추게 되었다. 삼 형제의 만남도 자연스럽게 각자의 가족 중심으로 바뀌었다. 우리 집도 서울에서 딸네 가족이 내려오면 음식을 준비해 함께 나누어 먹고, 아이들과 산소에 다녀오는 것이 명절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나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지난해 수술 후, 몸이 예전 같지 않다. 피로가 자주 찾아오고 집안일에 의욕이 사라졌다. 마음보다 몸이 신호를 먼저 보낸다. 나도 이제는 명절 음식을 하지 않고 쉬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셋째 딸과 이야기를 나누고 막내딸과도 의논한 끝에 우리 부부는 서울로 가기로 했다. 유교적인 생각이 몸에 밴 남편은 평생 자기 고집을 쉽게 꺾지 않던 사람인데 이번에는 슬며시 고집을 내려놓고 우리 의견을 따라 주니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장족의 발전이다. 남편에게도 이런 변화가 찾아오다니 놀라웠다.
매년 TV뉴스에서만 보던 역귀성. 나는 언제쯤 추석 음식과 손을 놓고, 멋진 공간을 찾아 여유롭고 근사한 시간을 보내 볼 수 있을까. 막연히 그런 날을 꿈꾸곤 했었는데, 드디어 결혼 58년 만에 그 꿈이 이루어졌다.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하듯 기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한다. 곁에 남편이 있어 얼마나 든든하고 고마운지, 기차를 타고 가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다. 남편에게 말도 붙이고 유리창 밖 풍경도 즐긴다. 기차가 3시간여 달려 수원에 도착하고 셋째 딸네 가족과 만나 예약해 둔 한옥 호텔에 입실했다.
숙소 중정숙소 작은 마당, 너무 운치 있고 좋았음
물의 정원 숨겨 놓은 보물 찾기라도 하듯
한옥 호텔은 오랫동안 차 생활을 해온 내 감성에 딱 맞는 분위기였다. 현대와 고전이 어우러진 고풍스럽고 단아하고 품격 있는 공간, 무엇보다 온전히 쉬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차를 마시는 다구와 녹차까지 준비가 되어있다니, 투숙객에 대한 세심한 배려에 금세 마음이 따뜻하다. 한옥 공간 배치며 소품 하나하나까지도 어쩌면 내 취향에 꼭 맞는지, 나는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차 마시는 공간 다실다탁과 다구가 준비되어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디에서도 받지 못한 위로를 한꺼번에 받는 기분이 들었다.
짐을 내려놓고 호텔 바로 뒤에 정조 대왕이 정약용에게 화성 축성을 맡겼다는 말만 들었던 성곽길을 사위와 걸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수원 화성 성곽길, 직접 눈으로 보기는 처음 일이다. 그 옛날 별다른 기계도 없었는데 그 많은 돌을 나르고 성곽을 쌓고 아름다운 누각을 지어 놓았는지 그저 놀랍고 감탄이 절로 나온다.
수원 화성 가운데 성곽 길 정자수원 화성 성곽 정자
명절이라 사람도 많았고 외국인 관광객들도 눈에 띄었다. 거리는 활기 넘쳤다. 밤에는 마침 미디어 아트 빛 축제도 열리고 있었다. 오래된 수원 화성의 건물 성곽 위로 화려한 빛이 어우러지니 옛것과 새로운 것이 한데 어울려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빛 축제 무용 공연빛 축제 무용 공연
성곽길 주변에는 관광객을 불러들이기 위한 카페와 작은 소품가게, 맥주와 음료를 파는 곳들이 들어서 있었다. 오래된 집들도 하나둘 새롭게 단장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세상은 이렇게 변하고 있었다. 살던 곳에만 머물면 세상 변해 가는 모습을 알 수 없다
맛있는 음식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먹으면 마음이 행복해진다. 남편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탄성을 냈다. "좋다 좋다" 평소 과묵한 남편도 오늘은 막걸리도 잘 마시며 이 순간을 즐기시는 모습이 보기 좋다. 지금까지 살아보지 못한 세상, 마음도 취하고, 인생살이에도 취한 듯하다. 구십이란 나이가 다 되어 가는 남편에게도, 팔십이 넘는 나에게도 지금껏 살아보지 못했던 이벤트였다.
"딸네 가족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런 날을 마주 할 수 있었을까?"
세상 사는 방법은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삶의 방향을 조금씩 달리해 보고 싶다.
특히 밤이 되어 한옥에 불이 켜지자 그 운치가 더욱 깊어졌다. 우리가 묵은 한옥 툇마루에 앉아 작은 중정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달이 휘영청 떠 있다. 차 한잔을 마시며 문득 달을 좋아했던 이태백은 이런 밤에 어떤 시를 읊었을까 생각했다.
다음 날에는 수원 화성 성곽길을 마차 타고 구경했다. 전통시장 다섯 곳이 모여 있는 곳, 이처럼 사람 많은 시장을 본 지 얼마 만인지 모른다. 정신이 없었다.
점심을 먹은 후 서울 막내딸네 집으로 모였다. 셋째 딸네 가족과 막내 딸네 가족이 함께 광화문에 있는 호텔 루프 탑에 올라 식사와 맥주를 마시며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핑크빛 노을이 지고 있다. 마음이 묘하다. 인생을 즐기는 방법도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부에게는 지금껏 살아보지 못한 세상이었다. '나는 왜 이런 걸을 모르고 살았을까?' 사는 것이 바빠서였을까. 곰곰 생각해 보니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즐기는 삶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회한과 기쁨이 동시에 마음속에 일렁였다. 호텔에서 내려와 광화문 거리를 걸었다. 명절 전날이라서 그런지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풍물을 치는 놀이마당도 열려 있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구경을 한다.
광화문, 풍물놀이
결혼 후 58년 만에 자녀들과 함께 서울에서 보낸 특별한 추석. 나는 그 시간 앞에서 오래도록 감동했다. 그래. 살아있다는 것이 축복이라는 말이 이제야 가슴 깊이 다가온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 정답이라고 딱 정의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구십을 바라보는 남편과 팔십을 넘긴 나. 이번 추석을 조용히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많이 가지는 삶보다, 쉬어가는 삶, 해야 할 일에 매여 있기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웃고 이야기하며 지금 이 순간을 누리는 삶, 58년 동안 지켜온 명절 풍경을 뒤로하고 처음 떠나본 역귀성. 그 길에 우리는 새로운 추석을 만났고 새로운 삶의 풍경도 만났다.
지금까지와 다른 명절을 선물해 준 딸들과 가족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다. 이런 날을 만나는 것이 늦은 나이에 찾아온 삶의 선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