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소리, 남편과 함께들었다

남편과 하루 산바카라을 하고 느낀 소회

by이숙자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하다 못해 살짝 서늘한 느낌이 든다. 계절의 변화는 여러 곳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포슬포슬한 햇살이며 어느 사이 사라진 매미 울음 소리. 풀숲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까지 자연은 용케도 자기들만의 계절을 알고서 우리에게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예전에는 사시사철 사계절은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줄만 알았다. 젊어서는 사는 게 바빠 사방을 둘러 볼 틈도 없이 살면서 무엇이던 당연한 줄 알고 살아왔다. 세상에 당연하다는 것은 하나도 없을 진데 그걸 몰랐다. 지구의 공전과 계절의 변화가 이제는 새삼 신비롭게 다가온다. 자연이 보내는 신호를 오감으로 느끼다 보면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것 같다.


매일 주어진 하루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시간이라는 사실도 절실하게 다가온다. 아마도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 사색의 공간이 더 넓어져 생각이 깊어진 탓일 것이다. 아니면 나이탓도 있을 것이다. 아침이면 하루 일정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할 일을 촘촘하게 계획한다. 오늘이라는 선물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 부지런을 낸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을 살피는 일이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된다는 걸 알기에 걷기는 매일 해야 하는 첫 번째 목록으로 들어간다. 오래 살아야 한다는 간절함 보다는 아파서 누구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소망이다.


여름 내내 덥다는 이유로 집에만 있던 남편도 계절이 바뀌고 나니, 산바카라 가자는 말을 거절하지 않아 반갑다. 다른 날은 절대 밖에 나가지 않으려고 해서 걱정을 하던 차다. 그늘에 서면 바람은 시원하지만 아직 햇살은 따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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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든 공원 산바카라길을 따라 올라가다 지대가 높은 곳에 이르면 아직도 파란 잔디가 눈을 시원하게 해 준다. 잔디 광장 옆, 새로 지어 놓은 정자는 사람들이 운동하다 쉼도 하고 할 일 없이 집안에서 보내는 노인들은 밖으로 나와 정자에 모여 도란도란 사는 이야기가 꽃을 피우며 무료함을 달랜다.


일이 없어 하루를 보내는 시간은 무료하고 답답할 수 있다. 우리 세대 노인들은 거의가 사느라 바빠 나를 위한 시간을 내고 취미 활동은 언감생심이었다. 지금의 세대와 사는 방법과 가치가 달랐다. 돌이켜 생각하면 노년 세대가 슬롯에서 열심히 산업 활동을 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발전하는데 한 축이 되었을 것이다. 세상도 많이 변했다.


남편도 다른 노인 세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의 삶을 살기보다는 어쩌면 가정과 가족이라는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온몸으로 살아 냈기에 지금의 우리의 가족이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자기를 돌보지 않고 자기 만의 삶을 산다는 것이 남편은 낯설다. 지금은 아무 할 일도 없고 본인 스스로 슬롯에서 도태된 듯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쓸쓸한 모습이라는 걸 알고 있는 듯 우울감을 느끼는 듯한 모습이 때론 안타깝다.


남편과 나도 함께 새로 지어 놓은 정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할 일 없는 노인들 몇 사람이 담소를 나누며 하루의 외로움을 건지고 있다. 남편은 옆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바람을 맞으려 멍 때리기를 하고 나는 휴대폰으로 글을 쓰고 있다. 앞에 보이는 나무는 초록의 잎들이 서서히 가을을 맞이하려는 듯 조금씩 노란 빛을 띠기 시작한다.


넓은 잔디밭 풀숲에서는 풀 벌레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고 얼굴에 닿는 바람의 느낌도 어느새 가을을 닮아있다. 집안에 있었으면 느끼지 못했을 가을이 오는 소리를 듣고 앉아있다. 계절이 변하듯 사람도 계절과 함께 변해간다. 살아온 세월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지고 생각도 조금씩 깊어진다.


사람의 연륜을 가볍게 볼일은 아니다.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 거친 뒤에야 비로소 삶의 지혜를 알게 된다. 가정 생활도 마찬가지다. 젊어서는 상대를 이해하기보다는 늘 내 입장에서 생각했고, 불만도 많았다. 남편과도, 시댁과도, 주변 사람들과도 갈등은 늘 따라다녔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이만큼 나이가 들고 보니 이제야 조금은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 것 같다. 내 생각을 고집하기보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는 것, 갈등보다 평화를 택하는 것, 이기려 하기보다 때로는 져주는 것. 마음을 내려놓으면 그렇게 어렵던 문제도 어느 순간 풀리곤 한다.


이제는 세상과 헤어질 날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도 세월과 함께 많이 떠났다. 계절을 하나씩 보내면서 그런 사실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지금까지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교류하며 살아왔다면, 이제는 부부가 서로에게 더 집중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멀리 가지 않아도 좋다. 가까운 곳이라도 함께 걸으며 서로의 시간을 나누며 우리만의 기억 창고에 추억을 쌓아가고 싶다. 산바카라을 마치고 외식을 했다. 오붓하게 마주 않아 밥을 먹는 소박한 시간도 즐겁다. 그런데 오늘은 유난히 달라진 남편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외식도, 외출도 싫어하는 남편, 이제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시간을 즐겼으면 좋겠다.


오늘 남편과 함께 자연 속에서 가을이 오는 소리를 마주 하고 보낸 시간은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다. 그저 함께 걷고, 함께 바라보고, 함께 밥을 먹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행복은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별스럽지 않은 소소한 일상 속에서 나는 오늘도 작은 행복 하나를 내 안의 주머니에 주워 담는다.


그리고 그 행복이 오래도록 우리들의 기억 창고에 남아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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