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루

남편과 공원 산바카라을 하고, 꽃 무릇 을 만난 날

by이숙자

더도 덜도 말고 오늘 같은 날만 되었으면. 바라보는 가을 하늘이 참 곱다. 코발트 빛 하늘에 솜뭉치를 풀어놓은 듯한 구름이 몽실몽실 떠 있다. 마음 같아서는 날개를 단 새처럼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고 싶다. 그런 유혹에 마음이 흔들려 나도 모르게 밖으로 나선다.


추석 무렵이면 가장 화려하게 꽃망울을 터트리는 상사화, 일명 꽃무릇. 못다 한 사랑을 피 토하듯 붉게 피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이 꽃은 게으름을 부리면 만나지 못하는 꽃이기도 하다. 며칠사이 환하게 피었다가 초라하게 시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때를 놓치면 못 만나는 꽃, 피어있는 기간도 짧다.


살고 보니 그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목숨 줄이라도 되는 듯. 사랑, 사랑을 외치며 살아간다. 아침을 먹고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월명 공원 꽃 무릇 보러 갑시다."


평생을 살아도 이벤트 한번 못하는 남편. 못하는데 어쩔 것인가. 그래도 내가 가자고 하면 거절하지 않고 같이 가주는 것만으로도 감지 덕지다.

기분 따라 수시로 변하는 남편의 마음, 마음 변하기 전에 얼른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현관문을 나선다. 가을, 참 좋은 날씨다. 추울까, 더울까 걱정할 필요도 없는 날. 이런 날만 계속되면 좋으련 만, 가만 생각해 보면 변화가 없으면 또 무슨 재미가 있을까. 사람의 마음도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데 날씨인들 변하지 않겠는가.


요즘은 예전처럼 빨리 걷지 않는다. 나이에 맞게, 몸이 받아주는 만큼 걷는다. 걷다 쉬다 다시 걷는다. 그러니 걸을 만하다. 아직은 하루 만보도 소화해 내는데 오륙 천 보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산바카라 나온 사람들도 많다. 가다 쉬다. 꽃길을 따라 걷는다.

군산 월명 공원산바카라길, 꽃 무릇이 핀 길


추석이 지난 후라 그런지 꽃은 시들어가는 것도 있고 아직 볼 만한 것도 있다. 오늘 만나지 않았다면 거의 시든 꽃만 보았을지도 모른다.


활짝 핀 꽃 무릇 아직은 지지 않은 꽃이 보기 좋았다



삶이란 순간의 예술이다.


빛의 속도처럼 빠른 생각의 순간을 놓치면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남편은 무심히 앞서 걷고 나는 혼자 꽃과 눈도 맞추고 말도 걸어보고 사진 찍느라 자연이 걸음이 느리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에 충실하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실행하면 되지 않을까.


산다는 것이 별것이랴. 그저 내 곁에 있는 것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기며 자족하면 되는 것을. 헛된 욕심에 마음을 빼앗기면 내 마음만 괴롭다. 때로는 같이 사는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편해할 것도 없다. 사람이 어찌 똑같을 수 있단 말인가. 누구나 저마다 다른 인격체인 것을. 다름을 인정해야 내가 편하다.


어쩌면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자체가 수행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은 마음을 내어 꽃구경을 나왔고, 사진도 찍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을 남편과 함께 걸을 수 있으니 이게 어디인가. 마음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 오늘 사는 일이 천국이다. 내일 모래 곧 구십이 되는 남편의 나이, 남편과 함께 할 시간, 알람을 맞추어 놓은 듯한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다.


지금 살아 있는 날,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오랜만에 산바카라을 나와 적조했던 남편친구 동생도 만났다. 반가운 해우다, 꽃 무릇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좌판기 커피 한잔에 옛정이 오고 가고 오래된 인연의 이야기가 꽃처럼 피어난다. 아, 오늘은 마치 소풍을 온듯한 느낌이다.


하루가 가고 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소풍 같은 날도 조용히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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