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 암 환자와 함께 지내고 있다. 그녀에게 지독한 고통은 삶의 조건이지만, 그 고통이 너무 크고 깊다. 하지만 치료제는 없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진통제다. 삶의 조건인 그 고통이 너무 크고 깊을 때 진통제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나 역시, 아니 우리 모두가 일종의 말기 암 환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은 고통이다. 살아 있다는 건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그 고통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깊어질 때가 있다. 소중히 여겼던 존재들이 하나씩 떠나고, 나 역시 서서히 죽음에 가까워져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그 지독한 고통이 엄습해 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역시 진통제를 찾을 수밖에 없다. 말기 암 환자가 아닌 이들의 진통제는 무엇일까?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가장 건강한 진통제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은 삶의 고통을 말끔히 낫게 해줄 치료제가 아니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 잠깐의 평온함을 줄 진통제이다. 사랑했던 이와 이별이 남기는 지독한 고통이 있다. 그 고통을 말끔히 낫게 해줄 치료제 같은 건 없다. 그저 ‘재클린 뒤프레’의 연주곡을 들을 뿐이다. 그 곡을 들을 때, 그리고 듣고 난 이후에 마음이 조금은 평온해진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찾아오는 고통이 있다. 그 고통을 말끔히 낫게 해줄 치료제 같은 건 없다. 그저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그러면 잠시 마음이 조금은 평온해진다.
예술은 가장 건강한 방식으로 우리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준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우리는 예술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세상 사람들은 삶이라는 고통 앞에서 의미 없는 잡담, 술과 섹스, 짧고 자극적인 영상을 찾는다. 그들이 삶의 고통 앞에서 허망한 쾌락을 찾는 건, 예술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마치 지독한 고통 앞에서 건강한 진통제를 찾지 못해 파괴적인 진통제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은 아닐까?
삶이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우리는 가장 건강한 진통제를 찾아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너무 늦기 전에 우리가 예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이유다. 여기서 우리는 미학, 즉 예술을 하나의 이론으로 확립하려 했던 칸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릇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 어떤가 하는 물음이 있을 때, 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그 사상의 실존이 어떤 중요성을 갖는가 또는 단지 어떤 중요성을 가질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순전한 바라봄에서 그것을 어떻게 판정하는가이다. 『판단력 비판』 엠마누엘 칸트
칸트 미학의 핵심은 “순전한 바라봄”에 있다. 이는 ‘무관심’ 혹은 ‘관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경향(본능·감정·욕망)’을 떠나 고요한(무관심) 마음으로 대상을 관조하지 못한다면, 아름다움의 영역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 여성의 누드화를 보고 있다고 해보자. 이때 ‘이 그림은 가격이 얼마일까?’ 혹은 ‘저 여자랑 섹스하면 어떨까?’라는 마음으로 그 그림을 본다면, 그 그림의 아름다움을 결코 느낄 수 없다. 우리는 그 누드화를 ‘무관심’한 혹은 ‘관조’한 상태로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