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고통 앞에서 춤추는 광대

1.

제목은 잊혔지만, 장면은 잊히지 않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은 늘 잘난 척하며 실없는 농담이나 하는 라디오 방송 작가였다. 그런 그가 매번 오프닝 멘트마다 눈물 나게 아름다운 글을 썼다. 매번 서럽도록 아름다운 글을 써내는 그를 동료 작가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 작가는 그 의아한 눈빛이 어색했는지, 짐짓 우쭐해하며 동료 작가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너희들은 이렇게 못 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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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른’의 무게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어른’의 무게는 삶의 고통에 있지 않다. 누구나 자신 삶의 고통이 주는 무게를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다들 '어른'인 것은 아니다. 삶에서 정작 중요한 질문은 '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가?'이다. 그저 고통의 무게를 버티기만 한다고 어른이 아니다. 그 고통을 삼키지 못해 주변에 고통을 흩뿌린다면, 그는 '어른'이 아니다.


‘어른’은 고통 속에 있으면서 웃어야 하는 존재다. ‘어른’의 무게는, 고통 속에 있으면서 ‘아이’는 고통을 느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웃어야 할 때의 마음이다. 그 서러움을, 외로움을, 그 분열을, 오롯이 홀로 견디며 미소 지어야 하는 무거움이 ‘어른’의 무게다.


검푸른 병원을 돌아 나와서 ‘아이’를 위해 푸른 바다를 준비해 줄 수 있는 이가 ‘어른’이다. 죽음을 지나오면서 죽음의 냄새를 풍기지 않고, ‘아이’ 앞에서 광대가 될 수 있는 이가 ‘어른’이다. 그렇게 그 서러움을, 외로움을, 분열을 마음에 담으며, 아이의 미소를 지켜줄 수 있는 이가 '어른'이다.


글은 ‘어른’의 무게를 감당했던 이들의 숨구멍이다. 고통 속의 ‘광대’가 삶의 무게에 눌려 숨 쉴 수 없을 때, 글은 숨구멍이 된다.


그 방송작가는 ‘어른’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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