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 생기기 이전에 수행이 있었습니다. 절이 생기고 나서 수행이 있었다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이나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니지 마십시오. 절에 다니는 10년 20년 됐다는 신도를 보면 대부분이 습관적으로 절이나 교회를 다니는 수가 많습니다. 절이나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니면 안 됩니다. 깨어 있어야 해요. 내가 왜 오늘 절에 가는가? 왜 교회에 가는가? 그때그때 스스로 물어서 어떤 의지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삶이 개선돼요. 삶은 개선되지 않고 어떤 행사에만 참여한다고 해서 그 절의 신자든, 교회의 신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무엇 때문에 내가 절에 나가는지 무엇 때문에 내가 교회 나가는지 그때그때 냉엄하게 물어야 합니다.” 법정 스님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번,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이의 죽음을 준비하러 고향으로 간다. ‘나는 그녀의 죽음을 함께 하겠다.’ 그녀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았던 날,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움이 눈까지 올라오지 않기를 애를 쓰며 했던 다짐이었다. 그 다짐을 두어 해 넘게 지켜오고 있다. 긴 항암으로 초주검이 된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고, 다시 서울로 오는 늦은 밤 기차 안에서 서늘한 질문이 찾아왔다.
‘나는 그녀의 죽음을 정말 함께 하고 있는가?’
삶은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일상’과 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타성惰性이며 습관이다. 아무리 의미 있는 일이라도, 그것이 ‘일상’이 되면 그 의미를 너무 쉽게 잃어버리게 된다. 삶은 지겨운 반복이며, 지겹게 반복된 일은 타성이 되고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던 온라인 게임도 연애도 결혼도 결국은 타성이 되고 습관이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삶은 무서운 것이다. 죽음마저 ‘일상’으로 집어삼키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순간, 그녀의 죽음을 함께 하지 않았다. 그저 타성에 젖어 습관적으로 기차에 몸을 실었을 뿐이다. 오늘 병원으로 가는 길이 막히지 않기를, 오늘은 항암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지겨운 ‘일상’을 대하는 마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부끄러움. 삶은 죽음마저 ‘일상’으로 집어삼킨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서 부끄러웠다.
늦은 밤, 기차에서 찾아왔던 서늘한 질문은, 그녀의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삶은 타성과 습관으로 얼룩진 ‘일상’과 싸우는 일이다. 이는 그 ‘일상’과 싸우지 않는다면, 더 이상 삶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일과 돈에 파묻혀 ‘일상’ 속에서 살아갔던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살아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삶이 아닌 것은 죽음이다.
삶은 반복과 싸우는 일이 아니다. 반복이 ‘일상’이 되지 않도록 싸우는 일이다. 삶은 사랑 아니면 죽음이다. ‘너’의 죽음을 함께 할 때도, 그것이 ‘일상’이 되지 않도록 싸우겠다. ‘너’를 사랑할 때도, 그것이 ‘일상’이 되지 않도록 싸우겠다. 지겹게 반복되는 삶이 죽음과 사랑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숨이 붙어 있는 한 끝까지 ‘일상’과 싸우겠다.
‘너’를 만나러 갈 때마다 늘 냉엄하게 묻겠다. 왜 나는 ‘너’를 만나러 가는가? ‘너’를 만나러 가는 기차 한 켠에서 울고, 또 웃겠다. ‘일상’과 싸워서 삶의 눈물과 미소를 잃지 않겠다. 나는 늘 깨어 있겠다. ‘너’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