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마음 에세이>
일그러진 얼굴이 자궁 밖으로 밀려 나오면, 탄생이라는 이름과 함께 삶의 고통이 시작된다.
그걸 이미 안다는 듯 갓 태어난 자는 울고, 이미 태어난 자들은 새로운 생명체 앞에 화사하게 웃는다.
그렇게 태어난 날을 사람들은 '생일'로 명명하여 해마다 축하를 한다.
무엇을 축하한다는 걸까. 이미 삶은 고통이라는 걸 누구나 아는데, 나만 당할 수 없다는 몽니에서 비롯된 풍습일까, 아니면 인생에서 간혹 가다 만나는 행복을 너도 잠시라도 느낄 수 있다는 걸 기뻐하는 것일까.
태어난 자가 있다면, 낳은 자가 있음을 어렸을 적 언젠가 깨달은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들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네가 태어났다면, 네 어머니는 극심한 고통을 감내했다는 말이었다. 관점의 변화였다. 그때 나는 한 뼘 더 자랐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나는 생일을 맞이하면 타인의 축하보다 어머니에게 더 먼저 감사의 말을 전했다. 나보다 키가 더 큰 우리 아이들이 자신들의 생일을 인지하기 시작한 때부터, 그들의 어머니인 내 아내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는 이유다.
그럼에도 부조리를 신봉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 누군가의 태어남은 누구의 덕도,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결론이다.
'자연의 섭리'나 '절대자의 설계' 정도로 설명하고 넘어가는 게 좋다.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나는 그걸 '절대자의 횡포'로 결론 지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러하다면 '탄생'이란 긍정적인 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반박을 하게 될 테니 참는 것이다. 누군가의 '축복'을 폄하하고 싶진 않다.
어릴 땐,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날이 생일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는 생일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특별하지 않은 날이 되어가고 있다.
슬롯인이라는 페르소나를 쓴 지금, 생일은 그저 페르소나에 적힌 나이라는 숫자를 하나 올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살아온 날들의 행복과 고통의 빈도를 나래비 세워봤을 때, 고통이 그 반대편에 있는 것보다는 더 많이 출몰했음을 부정할 순 없다. 그러나 순간의 어떠한 행복은, 몇 배의 고통을 잠재우고도 남는 산수나 수학적이지 않은 역할을 해내는 때가 분명 있으므로 그렇게 삶은 유지되는 게 아닐까... 란 생각을 종종 한다.
그렇다고 태어남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왜 '생명'이라는 공을 받아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왕 그 공을 쥐고 있다면 계속 그것을 들고뛰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공을 내려놓아야 할 때,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단 몇 초의 고도로 압축된 기억이 진짜 삶이지 않을까... 란 생각을 해본다면, 결국 순간순간을 잘 살아내야 하는 게 바로 인생일 것이다.
생일에 대한 이러한 무거운 상념들에도, 나는 축하의 말을 듣고 선물을 받고 가족들과 케이크의 촛불을 소원과 함께 껐다.
촛불 앞에서 한 나의 소원은, 나와 가족에 대한 것이었고 조금 더 그 범위를 넓혀 내가 아는 사람들이 삶의 끝에서 스스로의 삶을 평가하는 불현듯 떠오를 기억들에 대해 안도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후~'
촛불이 꺼지고,
나는 부조리와 상념을 잠시 잊고,
가족들과 삶의 달콤함을 만끽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