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마음 에세이>
황망한 소식을 접한 건 지난 금요일이었고, 나는 토요일 이른 새벽이 되어서야 유가족의 슬픈 눈을 보며 위로를 건넬 수 있었다.
어느 죽음은 예견할 수 있고, 또 어떤 죽음은 마음의 각오를 허락한다.
'호상(好喪)'은 그 둘을 아우르고도 남는다. 예견과 각오를 허하는 이러한 죽음은 떠나는 이에게도, 남는 자에게도 받아들임의 난도가 높지 않다.
그러나 소식의 황망함보다 더 큰 황망한 죽음 앞에서 나는 그 황망함에 동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떤 죽음은 예견할 수도, 각오를 허락하지도, 떠나는 이와 남는 자 모두 서로에게 아주 작은 이별의 말을 건넬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이별의 갑작스러움과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아픔에 대해 묵묵히 듣고 또 들었다. 황망한 죽음 앞에, 슬퍼하는 유가족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작지만 어찌할 수 없는 도리의 최선이었다.
지난가을,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지구 반대편에 있었다.
아무리 빠른 비행 편을 잡아도 한국에 도착하는 건 이틀 뒤였고, 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할까 불안했었다. 예견하지 못한 일이었고, 각오한 적 없는 소식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껴두었던 지난날이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비행하는 내내 못난 나의 마음을 찔러댔다.
다행히 어머니는 짧지 않은 혼수상태로부터 깨어나 대화도, 거동도 하시게 되었다.
나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언젠가 또다시 닥칠 어느 날에 대해 고뇌한다. 분명, 언젠간 일어날 일이기에, 그 고뇌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가셔야 한다면, 그저 편하게 가시기만을 바라는 나약한 존재로의 전락(轉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영원히 살 존재처럼 다투고 갈등한다. 잠시의 행복과 도파민을 위해 유한한 삶을 갈아 넣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전해져야 할 '사랑한다', '미안하다'란 말을 입 밖에 내뱉지 않고 다음으로 미루는 못된 버릇을 쌓아 간다.
그러다 맞이하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 그제야 우리는 많은 걸 깨닫게 된다.
그렇게.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각성이 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산 자는 죽은 자로부터 많은 걸 듣는다.
다만 나는, 이러한 '각성'의 시간이 조금 더 길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것은 그리 길지 않아, 우매한 인간의 본성에 따라 우리는 다시 누군가와 다투고 갈등하며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며 살아갈 것이다.
타인의 죽음이, 이제는 그리 나와 멀지 않은 이야기가 되고 있다.
어떻게 보내느냐, 세월이 흘러 어떻게 떠나야 하는가에 대해 고뇌하는 사이 해가 떠오르고 있었고, 이제 막 나는 집 근처 어느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