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마음 에세이>
회사에서 보고를 하는데, '반성 포인트'를 중심으로 작성하라는 가이드를 받았다.
보고 듣는 분께서 그걸 원하신다고 했다. 잘한 것을 나열하면 건방지게, 좋지 않게 생각한다는 게 이유였다. 반성이라... 갑자기 보고서와 반성문의 차이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시대의 조류와 보고서의 반성은 그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보고 듣는 분의 시대는 성장의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저성장의 시대, 저성장을 넘어 역신장하는 시대. 시대는 세대를 정의한다. 정의된 세대는 시대를 망각한다. 시대의 수혜는 잊고, 시대의 어려움은 부각한다. 이 둘이 더해지면 '왕년'이 탄생한다. 왕년에 나는 그렇게 잘했는데, 너희는 왜 이모양이냐...라는 말을 '반성 포인트'로 이야기해 봐라... 하는 게 요즘 보고서 트렌드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반성'은 '돌아볼 반(反)'과 '살필 성(省)'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아보고 살펴야 하는 주체와 객체는 같다. 주체도 '나'고, 객체도 '나'다. 반성은 '객관적 관찰'과 '재발 방지'를 포함해야 한다. 반성문, 아니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노트북 앞에서 한 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대체, 나는 무얼 그리 잘못한 걸까.
어릴 적, 반성문을 쓰는 건 상당한 곤욕이었다.
연필을 쥔 손가락이 아팠고, 있는 말을 죄다 갖다 놓은 것 같은데 단 몇 줄만이 채워져 공바카라 끝이 십리보다 더 멀어 보였다. 이걸 빨리 끝내고, 친구들과 공을 차러 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고 그래서 반성문의 다음 줄은 창작되지 못하곤 했다.
어른이 되면 반성문은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반성문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러한 삶을 설계한 게 누군지,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그때의 보고서는 어찌어찌해서 완성되었고, 보고는 또 어찌어찌해서 잘 끝났다. 납작 엎드려 스스로를 반성하니, 보고를 듣던 그분께서 나의 측은함을 헤아려 일종의 용서를 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한 임원 분께서, 나와 같은 상황에서 지적을 받다가 욱하는 마음에 대들까 말까를 고민한 적이 있다고 했다. 물론, 그러하지 않았기에 자신이 임원을 달수 있었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보고 하느라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다시 생각해 보니, 남 탓 말고 내 탓을 하라는 말이기도 했다.
반성이란 그런 것이다. 남 탓하면 남는 게 없다. 어차피 삶은 장사다. 남는 게 있어야 나에게 이득이다. 반성을 하면 남는 게 더 많다는 걸,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어른이 되기 전까진 남 탓을 일관했었다. 어른은 아이보다 말발이 더 좋다. 그러나 침묵해야 한다. 함부로 혀를 놀리면 안 된다. 말이 많으면 남 탓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러다 실수가 발생하고, 그러다 오해가 생겨난다.
그만 반성하고 싶지만, 남탓 하는 고약한 버릇이 다시 생겨날까 나는 다시 반성하기로 다짐한다.
다만, 삶과 자아에 대한 반성에 그걸 국한하고 싶다. 보고서엔 잘한 것만 가득 담고 싶다. 잘한 건 잘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아마도 반성하는 자세로 진심을 다해 살다 보면, 업무에 대한 성과와 운도 따라오지 않을까.
삶엔 그렇게.
돌아봐야 할 것들과.
살펴야 할 것이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