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 칠

도르래와 밧줄 긁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bystephanette

참나물에 국간장과 젓갈 그리고 마늘과 참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무치고 있었다. 잠시 기다려야 한다. 스며들 때까지.


지붕 위에서 도르래와 밧줄 긁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창 밖으로 밧줄이 떨어지고, 의자 같은 나무가 매달린다.

밧줄이 출렁인다.


공기는 하루 만에 싸늘해졌다.

바람 소리가 휘우우웅 거린다.


사람들의 웅얼거림.

선명하게 들리는 말소리이지만 어떤 말인지 이해할 수는 없다.

새소리와 함께 마치 부드러운 곡조처럼 들린다.


나는 빼꼼 밖을 내다보고는

열려 있는 창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나로 인해 놀라지는 않기를 바라며 스르륵 움직인다.


문득 어릴 때 기억이 떠올랐다. 잊고 있던 기억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쉬는 시간이었다.

창문 밖으로 하얗고 두꺼운 밧줄이 있었다.

창틀에 기대어 고개를 빼꼼 내밀었더니,

작은 나무 의자에 탄 페인트 공이

메로나색 페인트를 롤러가 달린 기다란 봉으로 칠하고 있었다.

창문 바로 아래 벽을.


넋을 놓고 구경했다. 사뭇 진지해진 표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페인트공이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고는 씨익 웃었다. 나도 덩달아 같이 웃었다.

눈빛에 장난끼가 가득하다.

긴 롤러를 옆에 끼고 작은 붓을 꺼내 들었다.

칠해야 하는 옅은 아이보리색 벽면에

메로나 색으로 글자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굴림체의 둥글린 가장자리는 삐뚤어지는 부분 하나 없이 매끈하게 이어졌다.

가로 획에 이어서 'ㄷ'이 형체를 드러냈다. 그 아래 'ㅗ' 그리고 받침인 동그라미까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다음에 이어질 글자는 영 상상하기 어려웠다.

'ㅂ'의 모양을 만들었을 때야 그제서 나는 그것이 우리 학교 이름이라는 걸 깨달았다.

페인트 공이 고개를 다시 들었다. 나는 그를 보고 활짝 웃었다.

옆에 달린 페인트 통에 다시 붓을 넣어 메로나 색을 듬뿍 입혔다.

그는 글자를 마저 완성하려고 하고 있었다.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수업 종이 치는 것은 듣지 못했다.

어느샌가 시끄럽던 아이들은 제자리를 찾아서 앉고 있었다.

교탁 앞에는 선생님이 서 있었다.

몇 명이 자리로 이동하는 그 짧은 찰나가 나는 너무 아쉬웠다.

'ㅐ' 자음이 거의 완성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단어가 완성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창 밖의 외벽과 교탁의 선생님을 번갈아 보다가

할 수 없이 자리로 들어와서 앉았다.


결국은 메로나 색으로 뒤덮여 사라질 그 단어를

페인트공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써 내려갔다.


그 순간, 세상에 딱 두 사람이 있었다.
바라보는 나.
그리고 자랑스럽게 자신을 드러내는 그.


마음이 쿵쾅거렸다.

완전히 빠져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신기한 그 광경에.


드르륵.

드르륵.


여전히 바깥에는 밧줄 소리가 들린다.

바람소리는 더 날카로워졌다.

도로의 낙엽을 치우는 기계 소리가 뒤섞여서 이상한 소리들이 울린다.


마지막 받침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서 미완성이다.
덮여버린 메로나 색 외벽 속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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