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샤는 나에게 몹쓸 짓을 했다.
핸드드립 레시피를 찾아보고 있었다.
어제는 큰맘 먹고 구입한 게이샤를 마셨다.
오늘은 늘 마시던 원두를 내렸다.
진하고 묵직하고 그리 힘들이지 않고도 편하게 핸드드립을 했다.
예전의 그 맛이 아니다.
게이샤는 내 취향은 아니었으나,
나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럴 줄은 알았으나 막상 당하고 보니 억울하다.
적절한 수준에서 만족하는 태도.
나는 그것을 유지하려고 꽤 애쓰는 사람이다.
물만 마셔도 상관없다.
그러나 나에게 최대만족 최대효과의 지점을 알고 싶다.
좋은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과하게 애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왜 적당히 만족해야 할까.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정도를 벗어나는 짓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과정의 번거로움이 더 귀찮다.
사람들이 하는 정도의 적당한 절충.
그런 것에서도 나는 늘 문제가 생긴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런 삶도 있다.
아주 작은 일이
나에게 오면 증폭된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나는 내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조심해서 살려고 노력한다.
똑같이 쇠고기를 먹어도
나는 탈이 난다.
똑같이 일을 해도
나는 주목받는다. 주목받는 것은 그 반대급부가 늘 따라다닌다.
똑같은 말을 해도
나의 말은 파급력이 크다. 그 결과는 아주 좋기도 하고 아주 나쁘기도 했다. 피드백으로 깨달은 바다.
내가 하는 생각과 말은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좋은 걸까? 글쎄다.
어째서인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상한 파장이 있어서 주변에 에너지를 마구 분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종류는 아니다. 그냥 감각하는 것이다.
슬픈 일이기도 하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과거로 돌아가서 뭔가 고칠 수 있다면,
나는 과거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이루는 것이다.
타인의 모든 과거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한다.
게이샤는 나에게 몹쓸 짓을 했다.
경험은 인간에게 비가역적인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슬펐다.
그렇게 기쁨은 슬픔이 된다.
사는 것이 그리 행복하지 않다.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
시지프스가 행복해서 매일 돌을 굴린 것은 아니다.
까뮈는 "시지프스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상상해야 한다."라고 했으나,
나는 까뮈에 반대한다.
"젠장, 지겨운 돌덩이 같으니라고."
시지프스는 필경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반항도 뭣도 아니다.
그냥 돌이 있으니까 매일 밀어 올렸을 뿐.
굳이 행복해야 할까.
왜?
행복도 게이샤도 언제 올지는 모른다.
그게 뭐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