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편타와 고통을 일부러 자청하는 수행에 대하여.
현실주의자들은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방향도 있다는 정도로 읽을 내용이다.
기독교 수행 전통에서 고통을 일부러 자청하는 수행이 있었다. 가끔 수도원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나온다. "장미의 이름"이었나 정확히 기억은 안난다. 매일 밤, 자신의 등을 채찍질하는 자기 편타, 금식, 철야, 거친 옷을 입는 행위 같은 것들이다. 그러는 이유는 여러가지 것들이 복합되어 있다.
가장 큰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몸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가 겪은 고통을 머리로 묵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 몸으로 조금이라도 나누면서 더 가까워진다고 본 것이다. 중세 기독교에서는 몸과 영혼을 지금처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몸에 가해진 행위가 영혼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도 현재의 관점일 뿐이다.
또 하나는 욕망과 자아를 훈련하는 것이다. 배고픔, 성욕, 안락함, 자존심 같은 욕구에 자동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일부러 불편을 선택한 것이다. 이 점에서는 금식이나 철야가 본래 수도 수행의 취지에 더 가깝다. 이슬람 라마단의 한 달간의 금식과 이웃을 위한 헌사 그런 것과도 연결된다. 고통 자체가 선하다는 쪽보다는 나는 내 욕망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일종의 훈련이다.
그리고 참회가 있다. 죄는 인간과 신 사이의 질서를 훼손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육체적인 고행을 회개의 표시로 사용했었다. 특히 중세 후기에는 흑사병 같은 재난 속에서 집단적으로 채찍질하며 죄를 씻으려 했던 편타자 운동이 나타났다. 다만 교회도 이런 극단적인 방향의 운동을 계속 긍정한 것은 아니었다. 지나친 자기 훼손이나 고행 그 자체를 숭배하는 태도는 비판받았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기억도 안나는 시절부터 아주 깊이 들어가 있었다.
기도와 금식과 희생과 봉헌은 밥 먹듯이 늘 하는 일상이었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접근이나 관점은 다른 이들과 많이 다를지도 모른다.
밤마다 옷을 벗고 등짝의 맨살을
기다랗고 작은 금속 조각들이 달린 가죽 채찍으로 내려치는 것은 아니지만.
내면적으로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피하지 않는다.
굶거나 잠을 자지 않고 기도를 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고통이 와도 희생으로 봉헌하는 기도를 했었다.
희생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는 일이다.
갖고 싶은 것을 갖지 않고
먹고 싶은 것을 먹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고
고통이 오면 그 자체를 당하고
기도로 바친다.
딱히 뭔가 대단해서도 아니고 영성이 좋아서도 아니다.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랐을 뿐이다.
다만 그 고통의 정체는 구분할 필요가 있고,
현실적인 해결과 영적인 것은 또 다르다.
그런 것을 모르는 건 아니다.
고통이 온다고 해서 그리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 에너지를 내가 어떻게 쓸지는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내면의 불순물이나 두려움, 욕망을 태워 없앨 수 있다.
그 고통을 통해 내 안의 두려움과 욕망을 더 또렷하게 볼 수 있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자.
굳이 누군가에게 이야기한 적은 없다.
그냥 내가 그렇다는 말이다.
사족
성지 순례를 하는 동안 금식을 정해놓고 일정 기간했었다.
맨발로 돌산을 오르면서 기도를 하기도 하고,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에서 준 오렌지를 희생으로 안먹기도 했다.
갓 나무에서 딴 오렌지는 향이 정말 좋다.
보다 더 정밀하고 섬세해진 감각으로 방 안 가득한 향을 느꼈다.
금식의 일종이다.
왜 그러는거냐고 하면
늘 그래왔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일상인 사람들도 있다.
기도 지향은 세계평화라 하자.
풀어서 말하자면,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묵상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