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있는지도 몰랐다
며칠 전 새벽,
건조기 속 플랫시트가 덜 마른 채로 있었다.
“왜? 어째서? “
전원을 켰다.
안 켜진다.
플러그를 뺐다가 다시 꽂았다.
그래도 먹통이다.
생각해 보니 심하게 부려먹었다.
환절기엔 어쩔 수 없다.
패브릭 종류는 다 한 번씩 세탁하고 정리하는 시기다.
열흘이 다되도록 거의 종일 풀가동이었다.
일상의 빨래와
그 중간의
이불 빨래들
커튼과
수건들.
들어갈 옷들과 나올 옷들.
가장 큰 용량의 건조기에 내심 매우 흡족해하고 있었다.
먹통이라니.
그래서 고장날만 했다고 지레짐작해 버렸다.
건조기 과로로 사망.
기사가 왔다. 두 분이나. 뭐 그렇게까지 올 일은 아닌데.
콘센트를 보더니 그 선이 아니란다.
그럼 뭐지?
멀티탭으로 연결했냐고 물어본다.
나야 모른다. 기억이 날리도 없다.
아, 산수를 못한 거구나.
세탁실 벽 콘센트는 2구.
전자제품은 3개.
3-2=1
그러니까 하나가 모자라다.
“아, 죄송해요. 멀티탭을 전혀 생각 못했네요.”
냉장고는 괜찮냐고 물어본다.
“이상이야 없죠.”
기사가 냉장고를 열어본다.
“냉기가 없는데요.”
우리 집 맞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열어볼 일이 없으니 알 수도 없다.
당연하다.
메인 냉장고가 아니다.
냉동실 안의 생강즙이 녹아있다.
곱게 갈아놓은 햇생강이 비닐백 속에서 눈물짓고 있다.
멀티탭이 사망했다.
산업용으로 구입하라고 한다.
“아, 그런 게 있어요?”라고 말하며 나는 잽싸게 쿠팡으로 검색해서 기사분의 오더를 받는다.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정해주는 것을
바로 주문했다.
전문가들이 아는 세계는 신기한 것들이 많다.
나는 급한 대로 새벽 도착한 조선호텔 드립커피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드린다. 뭔가 배우면 꼭 답례를 한다.
“괜한 걸음 하셨네요.”
귀신에 홀린 것 같다.
원래 허당일지도.
흠.
서브 냉장고 안의 모든 것이 다 녹았다.
어디까지 버려야 하는 걸까?
묵은지와
김치들과
젓갈들
잡곡과 콩
장류
햇채소들로 저장용으로 손질한 녀석들까지
아, 손질해서 삶아둔 돼지껍데기. 으으으으.
다 울고 있다. 나도 좀 슬퍼졌다.
어차피 잘 열어보지도 않는 곳이다.
난 거의 안 먹는다.
늘 똑같은 식단.
냉장고가 두 개까지 필요하지 않다.
어쩌면 하나도 없어도 무방하다.
냉장고 없이 살기도 했다.
일종의 실험이자 프로젝트였다.
오래전 이야기다. 혼자 살 때.
퇴근길에 그날 먹을 재료를 사 오면
불가능한 삶도 아니다.
애매할 땐 한 끼 굶어도 별 상관없다.
아이들이 있어서
거대한 냉장고에
서브 냉장고까지 갖고 있을 뿐.
일중독자이자
워킹맘의 생활에 맞는 가전이었다.
지금은 일도 대충 하기로 내려놓은 데다가
식재료를 쟁여 놓아야 할 의미도 별로 없다.
서브 냉장고 자체를 싹 치워도 아무도 모를지도.
흠.
그럴까?
어디까지 버려야 할지 잘 모르겠다.
마침 멀티탭이 고장 났다. 신의 계시라 생각한다.
그러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