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는 다시는 내리지 않는다고 해놓고 설레었다.
아, 이 머신이 아니다.
이런 머신도 아니다.
밑에 거치대도 필요 없다.
실린더를 꽂아 9 bar를 만들어주는 공압식 프레스다.
아, 이게 날 시험에 들게 한다.
피를 뽑으러 왔다. 기다리는 동안 머신 속에 빠져 있었다.
간호사는 나를 바로 알아본다. 가장 얇은 바늘을 찾아 스테인리스 그릇에 놓더니 이렇게 말한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
"저.. 너무 당연하게 밀실로 들어가자고 말하지 마세요."라고 하고 싶었으나 나는 잠잠히 앞장선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이미 알고 있다.
오픈된 채혈실에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해야 나의 피를 얻을 수 있다.
“벗으세요.”
그럴 줄 알았다.
아이보리색 리넨 오버핏 재킷을 벗었다.
속에 끈나시를 입고 왔다. 레이스가 화려하다. 그러나 나시는 이것밖에 없다.
그래, 벌건 대낮부터 블랙 레이스 나시를 입고 외출한 몸이시다.
채혈을 위해 나는 벗기로 했다.
그녀는 내 어깨와
팔과
손목과
손등을
다 샅샅이 훑어보더니
영 고개를 가로젓는다.
내 오른손 손등에 시선이 멈춘 채 그녀는 말한다.
”전에는 여기서 뽑았죠? “
오 마이갓,
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어디서 실패하고 어디서 성공했는지 기억하고 있다.
나의 혈관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알고 있다니. 감동이다.
여러 번의 실패 끝에
그녀는 서서히 무릎을 꿇고
결국 완전히 두 무릎을 땅바닥에 대고 있다.
그래도 실패다.
“여기 누워보세요.”
그녀는 내 옷가지와 가방을 옆으로 휙 하고 밀어붙였다.
그래,
결국은 누워야 한다.
그럴 줄 알았다.
그녀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잘못이 있다면
내 몸.
내 죄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생각하도록 하자.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혈관에 딱 꽂히는 그 느낌은
찌릿하면서 화끈거린다.
그런 느낌이 들다가
감각이 점점 흐려지면 당연히 실패다.
타오르는 느낌은 점점 강해져야 한다.
그녀도 감각한다.
실패라는 것을.
같은 공간에서
같은 감각을
각자 알고 있다.
어째서 채혈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하다 보니 갈 때마다 하고 있다.
이유는 모른다.
그런 설명을 해주는 이는 없다.
대증요법이면 다행이라 생각하자.
나는 피를 보기 위해
커피 머신을 찾고 있었다.
커피 머신을 찾는 덕에
피를 볼 수 있었다.
다음번에는 채혈을 하지 않도록 하자.
아뿔싸.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는 모른다.
사족
에스프레소는 다시는 내리지 않는다고 해놓고 설레었다.
공압식 에스프레소 메이커 덕분에
피를 볼 수 있었다.
말하고 보니 이상하다.
사족 2
글이 이상하다면, 약 때문이다.
집에 와서도 계속 아팠다.
그랬다.
약을 안 먹고 잊고 있었다.
어쩐지.
약을 먹었다.
몽롱하다.
어젯밤 꾸었던 잊고 있던 꿈이 떠오른다.
이런.
취한다. 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