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사건이 현재와 미래에 얼마나 큰 권력을 가질 것인가.
과거의 사건이 현재와 미래에 얼마나 큰 권력을 가질 것인가.
분노와 용서를 깊이 들어가면 그것의 구조를 알 수 있다.
알고 난 이후에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 사건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마사 C. 누스바움의 『분노와 용서―적개심, 아량, 정의』
3년 전인가 읽었던 바카라을 다시 읽고 있다. 분노와 용서는 최근 몇 년간 나의 주요 이슈 중 하나였다. 나는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고통스러웠고 그래서 무척이나 고민했다. 이 바카라은 분노와 용서에 관해 내가 찾아 읽은 바카라과 강연 중 가장 훌륭한 저서라고 생각한다.
제목만 보면 분노를 다스리고 상처를 용서하는 법에 관한 바카라처럼 보인다. 처음 읽을 때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몇 장 지나지 않아 예상이 깨졌다. 누스바움이 겨누는 것은 감정조절의 기술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다. 인간은 왜 피해를 입은 순간 상대의 고통을 요구하게 되는가, 왜 정의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상대가 낮아지는 장면을 상상하는가, 왜 용서는 선한 행위처럼 보이면서도 용서하는 사람과 용서받는 사람 사이에 미묘한 위계를 만들어내는가. 결국 이 바카라이 묻는 것은 분노와 용서보다 인간이 상처 이후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다시 구성하는가에 관한 문제다.
상처를 입으면 세계의 질서가 잠시 무너진다. 내가 타인에게 어떤 존재인지, 나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 내가 얼마나 존중받고 있는지에 관한 암묵적인 가정이 흔들린다. 그래서 분노에는 손해의 계산만 들어 있지 않다. 나라는 존재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가에 대한 평가가 함께 들어간다. 상대가 나를 무시했다는 느낌,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했다는 느낌, 내 가치가 내려갔다는 느낌이 붙는다. 이 순간 분노는 피해의 복구를 넘어 지위의 복구를 원하기 시작한다. 상대가 사과하기를 바라고, 후회하기를 바라고,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닫기를 바라고, 때로는 고통받기를 바란다. 이상한 점은 그 모든 일이 실제 피해를 되돌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배신은 취소되지 않으며, 죽은 사람은 살아오지 않고, 모욕당했던 순간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상대가 내려가면 내가 조금 올라가는 듯한 감각이 생긴다. 누스바움이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이 바로 이 심리적 회계다.
이 회계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분노가 얼마나 자주 지위의 언어를 사용하는지 보인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라는 문장에는 단순한 고통 이상의 것이 들어 있다. 그 행동이 나에게 행해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래서 같은 행동도 낯선 사람이 했을 때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했을 때 훨씬 크게 느껴진다. 가까운 사람에게 우리는 자신의 취약성을 맡긴다. 기대와 신뢰를 주고, 동시에 나를 상처 입힐 수 있는 권한도 준다. 친밀성은 깊이와 함께 위험을 만든다.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을수록 그의 행동은 내 존재 가치에 대한 평가처럼 읽히기 쉽다. 그래서 가까운 관계에서 분노는 쉽게 존재론적인 문제가 된다. 어떤 행동 하나가 “나는 너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번진다.
복수의 욕망은 이 지점에서 이해된다. 상대를 아프게 하고 싶은 마음은 고통 그 자체를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서는 손상된 세계의 균형을 복구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네가 나를 낮췄으니 너도 낮아져야 한다. 네가 나를 아프게 했으니 너도 그 무게를 알아야 한다. 네가 나의 중요성을 몰랐다면 잃고 나서라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이렇게 상대의 고통을 의미의 증거로 사용한다. 상대가 후회하면 내가 중요했던 것이 증명되고, 상대가 무너지면 내가 당한 일이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 확인되며, 상대가 돌아와 사과하면 나의 가치가 회복된 듯 느껴진다. 분노의 깊은 곳에는 종종 복수보다 인정 욕구가 있다.
그래서 분노는 과거를 붙잡는다. 사건은 이미 끝났지만 의미는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계속해서 사건을 다시 읽고, 누가 옳았는지 판단하고, 바카라임을 배분하고, 상대의 의도를 추정한다. 여기서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재판정이 된다. 같은 사건을 반복해서 불러내고 새로운 증거를 붙이고 형량을 다시 계산한다. 피해자는 자신의 상처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처럼 되고, 상대는 끊임없이 피고석에 놓인다. 심지어 관계가 끝난 뒤에도 이 법정은 내부에서 계속 열린다. 상대가 존재하지 않아도 재판은 가능하다. 머릿속에서 계속 질문하고 답하고 판결하면 된다.
누스바움이 제안하는 이행의 의미가 그래서 크다. 이행은 화를 느끼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판단도 사라지지 않는다. 핵심은 질문의 방향을 바꾸는 데 있다. “저 사람에게 얼마만큼 되갚아줄 것인가”에서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로 이동한다. 과거의 원인을 지우지 않은 채 미래의 조건을 설계한다. 다시 같은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경계를 만들 수도 있고, 관계를 끝낼 수도 있고, 법적 바카라임을 요구할 수도 있고, 제도를 바꿀 수도 있다. 여기에는 이상하게도 상대의 회개가 필요하지 않다. 상대가 끝까지 이해하지 못해도 나는 행동할 수 있다. 상대가 사과하지 않아도 나는 경계를 세울 수 있다.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도 법은 움직일 수 있다. 회복의 주도권이 다시 피해자에게 돌아온다.
이 지점에서 용서의 문제가 등장한다. 용서는 분노보다 더 선한 언어처럼 보인다. 그러나 누스바움은 용서의 구조에도 같은 회계가 숨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잘못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하고, 낮아지고, 용서를 구한다. 피해자는 그 과정을 평가한 뒤 용서를 허락한다. 얼핏 아름다운 화해처럼 보이지만 관계의 위치가 분명해진다. 한쪽은 죄인이고 다른 한쪽은 사면권자다. 상대의 도덕적 상태를 판정할 권한이 피해자에게 생긴다. 복수의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 때로는 도덕적 우월성이 들어선다.
그래서 용서는 의외로 분노와 멀지 않을 수 있다. 분노는 “네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라고 말하고, 어떤 형태의 용서는 “네가 충분히 회개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둘 다 상대의 내면 상태를 조건으로 삼는다. 상대가 얼마나 후회하는지, 얼마나 낮아졌는지, 얼마나 나의 고통을 이해했는지를 확인한다. 결국 상처를 입힌 사람의 정신 내부까지 관리하려는 욕망이 생길 수 있다. 상대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어느 정도 죄바카라감을 가져야 하는지까지 요구하게 된다. 여기까지 가면 피해자는 자신의 회복을 상대의 정신 상태에 맡기게 된다.
이 바카라에서 가장 급진적인 질문은 그래서 “용서할 것인가”보다 더 깊다. 상대를 용서할 필요가 반드시 있는가. 어떤 일을 잘못이라고 판단하면서도 그 사람을 영원히 죄인의 자리에서 바라보지 않을 수 있는가. 그 사람과 다시 관계를 맺지 않으면서도 심판자의 역할에서 내려올 수 있는가. 다시는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고통을 바라지 않을 수 있는가. 바카라임과 처벌을 요구하면서도 증오를 삶의 연료로 사용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용서의 미덕보다 훨씬 어렵다. 용서는 하나의 선언으로 끝낼 수 있지만 심판자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일은 훨씬 오래 걸린다.
친밀한 관계에서 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분노에는 피해뿐 아니라 상실의 공포가 섞인다. 상대가 나의 기대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 사람의 자유가 드러난다. 그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고, 나를 떠날 수도 있고, 나보다 다른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사랑은 타인의 자유를 전제로 하지만 인간은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 자유를 견디기 어려워한다. 상대가 자유롭다는 사실은 언제나 상실 가능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제는 사랑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생겨난다. 상대의 일정, 감정, 행동, 선택을 알고 싶어지고, 그가 나에게 어떤 위치를 부여하는지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 확인이 실패하면 분노가 나타난다.
여기서 망신주기와 비난이 작동한다. 사람은 상대를 통제하기 어려울 때 도덕적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네가 잘못했다”는 말은 실제 판단일 수 있지만 동시에 상대를 특정 위치에 고정하는 힘을 가진다. 네가 잘못했고 내가 옳다면 관계의 방향을 결정할 권한이 내게 생긴다. 상대에게 죄바카라감을 느끼게 만들면 그의 행동을 바꿀 가능성도 커진다. 친밀한 관계에서 도덕성은 그래서 때로 통제 기술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사랑보다 죄바카라감을 사용할 때가 있다.
그러나 타인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고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두려워서 행동을 바꾸었는지, 수치심 때문에 복종한 것인지, 실제로 이해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자유로운 타인인데, 그 자유가 불편해서 통제하기 시작하면 결국 내가 사랑했던 조건을 스스로 훼손하게 된다. 타인이 나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 나를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 내가 모르는 내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관계의 위험을 만든다. 동시에 바로 그 독립성 때문에 관계는 사랑이 된다.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존재와의 관계에는 신뢰도 필요 없다.
누스바움의 정치적 논의도 같은 구조를 가진다. 개인의 분노가 “저 사람이 고통받아야 한다”로 흐르듯 공동체의 분노 역시 “저 집단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로 흐를 수 있다. 형벌과 혁명은 이 욕망을 제도적으로 확장할 위험을 가진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가해자의 고통을 늘리는 데 집중하면 슬롯는 과거의 피해를 반복해서 재현하게 된다. 그래서 형벌의 목적을 다시 물어야 한다. 슬롯를 안전하게 만들 것인가, 재범을 줄일 것인가, 피해를 복구할 것인가, 사람을 교화할 것인가. 이런 질문은 미래를 향한다. “얼마나 고통받아야 충분한가”라는 질문에는 끝이 없다.
만델라의 아량이 누스바움에게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량은 과거를 잊는 태도가 아니다. 잘못을 축소하지도 않는다. 기억하면서도 그 기억을 미래의 복수 프로그램으로 만들지 않는 능력에 가깝다. 여기에는 엄청난 정신적 전환이 필요하다. 인간은 상처를 입으면 자신의 도덕적 정체성을 피해 경험 위에 구축하기 쉽다. “나는 피해를 입은 사람이고, 저 사람은 나를 해친 사람이다.” 이 서사는 사실을 담고 있지만 오래 지속되면 나의 존재가 과거 사건에 종속된다. 상대는 이미 떠났는데도 나는 계속 그와 관계를 맺는다. 분노라는 형태로.
그래서 이 바카라의 핵심은 어쩌면 분노를 제거하는 데 있지 않다. 과거의 가해자가 현재의 나를 계속 조직하도록 허용할 것인가에 있다. 누군가 나에게 한 일이 앞으로의 삶에서 얼마나 큰 권한을 가질 것인가. 그의 사과가 있어야 내가 자유로워지는가. 그의 후회가 있어야 나의 가치가 회복되는가. 그의 처벌이 있어야 사건이 끝나는가. 그렇게 된다면 그는 여전히 내 삶의 중요한 결정권자다.
여기까지 오면 자비의 의미도 달라진다. 자비는 상대에게 베푸는 선량함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간이 불완전하며, 자신도 타인도 언제든 잘못 판단하고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세계의 기본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자비에는 일종의 인식론적 겸손이 있다. 나는 상대의 내면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나의 해석도 틀릴 수 있다. 현재의 분노가 사건 전체를 설명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사실 판단을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판단이 언제나 부분적이라는 사실만 기억한다.
그렇다면 정의는 무엇인가. 누스바움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정의는 감정적 균형의 회복보다 조건의 변경에 가까워진다. 누군가 나를 다치게 했다면 그 사람을 아프게 해서 균형을 맞추는 방식보다 다시 다치지 않을 구조를 만드는 쪽이 중요해진다. 개인에게는 경계가 될 수 있고, 슬롯에는 법과 제도가 될 수 있다. 정의의 단위가 고통의 교환에서 미래의 설계로 이동한다.
이렇게 보면 복수의 여신이 자비의 여신으로 변한다는 첫 장의 이미지는 바카라 전체의 핵심을 거의 다 담고 있다. 복수의 에너지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부당함을 감지하는 힘, 피해를 기억하는 힘, 행동하게 만드는 힘은 남는다. 방향만 바뀐다. 상대를 파괴하는 데 쓰이던 힘이 미래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과거는 여전히 기억되지만 더 이상 미래의 설계자가 되지 않는다.
나는 이 바카라을 다시 읽으며 용서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상대를 심판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상대가 나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아지는 일이다. 사과를 받지 못해도 나의 경험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다. 상대가 불행해지지 않아도 내가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바카라을 읽으면서 남는 질문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정의인가.
상대의 고통인가.
나의 가치가 확인되는 장면인가.
상대가 나를 잃고 후회하는 장면인가.
내가 옳았다는 판결인가.
그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면 분노는 상대에 관한 감정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에 관한 정보가 된다. 내가 무엇을 잃었다고 느끼는지, 무엇을 위협받았다고 생각하는지, 어떤 인정이 필요한지 보여준다. 그 정보를 읽고 나면 선택지가 생긴다. 상대를 계속 바라볼 수도 있고, 내 삶의 구조를 바꿀 수도 있다.
어쩌면 누스바움이 말하는 자비는 타인을 위한 마지막 선행보다 과거가 현재를 독점하지 못하게 하는 정신의 정치학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 글의 핵심은 분노와 용서보다 더 깊이 들어간다. 그것은 과거 사건이 현재의 의사결정 구조를 계속 점유하는 문제다. 상대의 사과, 후회, 처벌이 있어야 끝낼 수 있다면 결정권을 아직 상대에게 준 상태이다. 자유는 분노라는 감정이 없어지는 상태라기 보다, 인과관계의 주도권을 회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노와 용서는 시간의 권력 문제다.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정체성과 미래의 선택을 계속 조직한다면, 가해자는 물리적으로 사라져도 구조적으로는 계속 남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분노와 용서의 자리에서 벗어나 자유로 나아가는 방법에 대한 바카라이다.
분노는 상대를 향한 감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간의 방향을 과거로 고정시키는 장치가 될 수 있다.
용서는 미래를 향한 행위처럼 보이지만, 상대의 회개를 조건으로 삼는 순간 역시 과거의 법정에 머무를 수 있다.
자유는 그 법정을 폐쇄하는 일에 가깝다.
상처는 이미 일어났다.
이제 남는 질문은 누가 벌을 받을 것인가가 아니다.
그 사건 이후의 세계를 누가 설계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