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세밀하게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된다.
글쓰기를 하면서 깨달은 것들이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독특한 것이,
입으로 소리 내어 말로 출력하지 않으면
생각은 이미지나 감각 혹은 무의식적으로 저장되어 있는 상태다.
말이나 글로 출력하지 않으면 나도 잘 모른다.
잘 모른다기보다는 몸으로 감각하고 결과만 알 뿐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런 것이 나왔는지 모른다.
나중에 이성적으로 분석을 해서 글을 쓰면 의미가 붙는다.
하긴, 사람의 결정이야 감정이나 무의식적으로 내리는 것이고,
그 의미는 나중에 이성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것에 매우 동의하게 되었다.
언어는 사고의 기록 장치이면서
동시에 사고의 생성 장치다.
그러니까 글을 써 가면서 깨닫게 되고
다음 글을 이어서 쓸수록 점점 더 선명하고 섬세하고 정확하게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된다.
해상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아주 비슷하지만 명백하게 다른 것에 대해서 구분할 수 있게 된다.
머릿속에서 이미 완성된 생각이란 없다.
그것을 옮겨 적는 것도 아니다.
쓰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생각은 형성된다.
그리고 쓰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사고의 구조가 생겨난다.
가끔은 내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도
나는 잘 모른다.
그래서 제때 잘 말을 못 할 때가 있다.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을 하는 건,
오래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감정이 큰 순간에도 그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내면에 많은 데이터들이 쌓이지만 그것은 혼재된 채 비언어적 묶음으로 존재한다.
예를 들면 불편함, 긴장, 이미지, 장면, 작은 어긋남들이 먼저 저장되고,
시간이 지나 글이나 말로 꺼내면서 그제야 나는 그 감정에 이름을 정확히 붙이고
여러 감정들의 혼합 비율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을 통해 나는 그 상황을 이해한다.
슬픔 60, 분노 20, 그리움 10, 안도 10 같은 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장은 알 수 없다.
말이나 글을 통해서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특정 순간의 것이지,
영원한 것도 아니다. 미래에 또 다른 깨달음이 오면 감정의 이름과 비율은 달라진다.
이상한 기분도 든다.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말하는 것도 아니다.
말하면서 생각을 발견하는 것이다.
어렴풋한 어떤 느낌이나 감각의 뒤섞인 형체는
글이나 말로 나오기 전에는 매우 추상적이고 무엇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설령 자신이 정확히 인식한다고 생각하더라도
막상 비교해 보면 아직 언어가 되지 못한 상태와 그 이후는 완전히 다르다.
글쓰기와 말하기 같은 출력은
곧 자기 인식이다.
내면의 바닷속에는 수많은 해초가 자란다.
물의 흐름에 따라 흔들린다.
그러나 그 감정과 감각들이 곧 나는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모순되기도 한다.
슬픔이 등장한 뒤
그 반대급부처럼 기쁨이 나타나기도 한다.
긴장 이후에는 이완이 오고,
압박 이후에는 느슨해진다.
달려가고 싶다가도
다시 주저앉는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다만 관찰의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