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앞의 '믿음', '희망'과 이어지는 글이다.
이 글은 ITAL 310: Dante in Translation, 주세페 마초타(Giuseppe Mazzotta) 교수 강의 중 21강, 『신곡』 천국편 24·25·26곡 중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마초타 교수는 꽤 유명한 단테 연구자다. 예일대 Sterling Professor Emeritus이고, 단테·보카치오·페트라르카·비코 등 이탈리아 문학과 사상사를 폭넓게 연구해 온 학자다. 이 강좌는 『신곡』 전체를 지옥편부터 천국편 끝까지 24강으로 훑는 공개 대학 강좌라서, 단테를 제대로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오래 찾아보는 콘텐츠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 그래서 사랑이 뭐라고?
믿음과 희망을 지나 마지막 덕, 사랑
믿음(faith), 희망(hope), 사랑(charity) 사이에는 진행 progression이 있다. 이 세 가지를 알고, 그것들이 인간에게 무엇을 하고 인간 안에 무엇을 만들어내는지 이해해야만 지복직관 beatific vision이 가능해진다.
믿음이 무엇인지 시험받았고,
희망이 무엇인지 시험받았으니,
이제 사랑도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가 나올 것 같다.
그러나 그 기대는 바로 깨어진다.
믿음과 희망에서는 인용할 수 있는 일종의 공식, 정의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서도 그와 같은 공식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We would be looking for it in vain. There’s no definition of love.”
그러나 헛되이 찾게 될 것이다. 사랑의 정의가 없기 때문이다.
단테는 사랑이라는 말 자체를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마초타가 단테의 태도를 해석하면서 한 말이다.
“this is ‘the word.’”
사랑은 “그 말”, 핵심어다. 여기서 the는 a word, 여러 단어 중 하나가 아니다. “그 말”, 말들 가운데 특별히 근원적인 말이라는 의미다.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는 안다. 우리 주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경험한다.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랑을 일정한 경계 안에 가두고, 정의하려 하면 사랑은 빠져나간다.
"사랑은 모든 가능한 정의에서 빠져나가는 핵심어이고,
우리는 그것을 여러 방식으로 이해하지만 완전히 가두거나 정의할 수 없다."
사랑을 정의하는 행위 자체가 사랑이 인간에게 미치는 작용과 그 고유한 가치를 축소한다. 이는 사랑의 성질과 관계가 있다. 무언가를 정의하면 경계를 만든다. A는 이것이고, 여기까지가 A라고 범위를 제한한다. 사랑은 그렇게 봉쇄하면 원래 가지고 있던 의미의 힘을 잃을 수 있다.
이것은 사랑을 일부러 신비화하는 말하고도 조금 다르다.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그러니 이상한 상태다.
알고 있다.
그런데 정의할 수 없다.
사랑은 언어의 근원과 연결된다
마초타는 단테의 『속어론』, De vulgari eloquentia를 끌어와서 언어론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테에게 love라는 말은 과거로부터 남아 있는 매우 근원적인 말과 같은 지위를 갖는다.
『천국편』 24곡의 시작에서 음식과 연회가 사람들을 모으는 것처럼, 언어 역시 우리를 모으고 함께 있게 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음식—처음에는 음식이 하나의 은유로 제시되었고, 이제 사랑은 어떤 특정한 정의에서도 빠져나가면서도 이 모든 신학적 덕의 정점이 된다.
사랑과 아담
『천국편』 26곡 끝으로 가서 단테가 아담을 만나는 장면을 보자. 이 만남은 '시작'과의 대면이다. 아담은 최초로 세계에 이름을 붙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초타는 아담을 원초적인 시인이라고 부른다. 시인은 세계에 이름을 붙이고, 이름을 통해 세계를 우리 앞에 존재하게 만든다.
단테는 아담에게 말을 건다.
“O fruit that alone wast brought forth ripe.”
“홀로 익은 상태로 태어난 열매여”
마초타는 단테가 아담을 ‘익은 열매’라고 부름으로써 그가 이미 은총의 상태에 있었다는 쪽을 암시한다고 설명한다.
아담의 죄는 과일을 먹은 것이 아니다
“trespass beyond the mark”
표시된 한계, 경계를 넘어선 것.
아담의 문제는 경계 침범이었다. 신의 명령은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왜 단테는 먹는 행위보다 경계가 문제라고 하는 것일까. 지식을 얻는 것 자체는 악하지 않다. 아담이 열매를 먹으면서 어떤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고 자신을 고양시키는 것 자체는 좋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그 지식이 아담에게 나도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인간과 신 사이의 경계를 제거해 버린 것. 그래서 추락은 역설적으로 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자기 인식을 회복하는 과정이 된다. 이것은 자기 인식의 성장이다.
사랑의 문제는 언어의 유한성으로 넘어간다
아담은 단테에게 자신이 사용했던 언어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벨탑의 니므롯 이야기가 등장한다. 인간의 언어는 영원히 고정되어 있지 않다.
단테도 처음에는 언어는 고정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록 속에서 신을 의미하는 단어조차 그 철자가 변화했다. 즉, 역사 속에 영구히 지속되는 단 하나의 신성 언어란 없다.
사랑도 인간이 끊임없이 말하는 것이지만,
그 말을 영원히 고정할 하나의 완전한 언어는 없다.
언어는 인간과 신 사이의 ‘거리’의 표시다
인간의 언어는 신적인 것과 인간 사이의 거리의 표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우리의 추방된 상황, 우리의 추방된 처지의 일부다. 따라서 단테가 지금까지 설명해 온 모든 신학적 언어 역시 인간의 이러한 추방 상태에서 비롯되는 갈망의 일부다.
단테가 신학을 사용하고, 신학에 대한 시험을 진행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다시 세계로, 바로 이 세계로 되돌려놓기 위해서다. 우리가 계속 희망하고, 믿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 세계.
그리고 우리는 이 말들이 모두 어느 정도 신비로운 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믿음은 하나의 신뢰(trust)다. 그것 없이는 우리가 서로 함께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희망은 믿음의 실현(the realization of faith)이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가 언제나 갈망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의미는 어떤 식으로든 신비롭게 계속 우리에게서 빠져나간다.
이것들이 단테가 논의하고 있는 세 가지 근본적인 문제다.
강의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완전히 원을 그린다.
사랑은 정의할 수 없다.
이렇게 시작한 강연은 마지막에 여기에 당도한다.
우리는 계속 사랑을 갈망하지만 사랑의 의미는 계속 빠져나간다.
이것이 강의에서 말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의 정의를 알고 싶어서
이 강연을 들었다.
여기서 말한다.
아, 어디로 가야 하나.
마사 누스바움으로 가보자. 저서의 어딘가에 단테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하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도대체 사랑이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