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가 너무 많아진 시대의 기획법
10년 전 이맘쯤이었다. 교환학생을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던 시절, 해외 있는 대학교를 가기 위해 국내 디자인으로 유명한 학교를 도중에 그만두고 나와 함께 공부하는 형이 있었다. 그 당시에 난 형이 참 부러웠다. 같은 디자인을 배우는 대학이지만 형이 재학 중인 학교는 당시 세계 디자인 어워드를 휩쓸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런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도전하는 형의 모습이 멋있었다. 어느 날 저녁을 먹으며 형에게 물어봤다. 왜 해외 대학교를 가려하냐고? 무엇 때문에 해외에서 디자인을 다시 배우려고 하냐고?
형은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열변을 토해냈다. 한국 디자인 대학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한국 디자인이 얼마나 별로인지. 그중 나의 뇌리의 꽂힌 말이 있었다. 레퍼런스 짜 맞추는 게 싫어 처음부터 하나씩 쌓아가서 결과물을 도출하는 ‘디자인’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다. 레퍼런스 짜깁기란 결과물을 만든 후 거기에 맞는 근거를 찾는 방법이다. 그 이후로 레퍼런스 짜깁기를 경계하며 디자인을 하였다. 기획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과를 정하기보다는 여러 데이터와 이야기를 연결하여 문제를 찾아내 해답을 만들었다. 레퍼런스 짜깁기를 좋은 방법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답을 정해놓고 시작하는 건 잘못된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동안은 레퍼런스 짜깁기는 제대로 된 기획이 아니다는 신념 아래 일을 했다. 결과를 정해 놓고 일하는 사람은 제대로 된 기획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인하우스 들어와 레퍼런스 짜깁기에 대한 생각이 점점 바뀌게 되었다. 생각보다 세상은 데이터와 데이터가 쌓여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곳이 아니었고, AI가 등장하면서 시장의 정보와 근거를 찾는 일도 훨씬 쉬워졌다. 그런데 출처까지 달린 수많은 데이터는 오히려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수많은 데이터를 보다 보니 A 방향에도 충분한 근거가 있었고 B 방향도 말이 됐다. 그 사이에서 어떤 방향이 브랜드에 맞는지 모르고 헤매기 시작했다. 방대한 데이터량에 압도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최근까지도 그랬다. 광장을 새롭게 기획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시작부터 막막했다. 운영하는 사람도, 경영진도 이곳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뚜렷한 답이 없었다. 고객 데이터도 보고 트렌드도 찾아보고 비슷한 공간도 수도 없이 뒤졌다. 자료는 계속 쌓이는데 이상하게 답은 더 안 보였다. A도 맞는 것 같고 B도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가상 수익성 또한 도출해야겠지만 그전에 이 공간이 어떤 방향성으로 바뀌어야 하는지 도로지 감이 안 왔다. 트렌드를 보고 데이터를 봐도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 사람들이 광장을 이용하는 방식도 제각각이었고, 평균적인 고객상을 잡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헤매고 있을 무렵 팀장님께서 ‘레퍼런스 짜깁기’를 해보라는 제안을 주었다. 머릿속에 둥둥 떠 있는 데이터에서 길을 잃지 말고,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광장의 모습을 먼저 그려보라는 얘기였다. 어떤 브랜드가 들어가면 가장 그 광장스러울지, 어떻게 존을 나누고 어떤 경험 콘텐츠를 넣었을 때 그 광장이 해당 브랜드다운지 만들어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팀장님이 말한 ‘레퍼런스 짜깁기’는 내가 학생 때부터 싫어했던 방식과는 달랐다. 답을 먼저 정하고 근거를 끼워 맞추라는 얘기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한데 모아 내가 먼저 하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는 뜻이었다.
프로젝트는 진행 중이지만 레퍼런스 짜깁기는 방향성을 잡는데 유용했다. 여러 데이터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상태에서 일단 이 광장에 어울릴 것 같은 브랜드들을 모아봤다. 하나씩 뜯어보며 비슷한 특징끼리 다시 묶었다. 그러자 내가 만들고 싶은 광장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더 구체적으로 그려본 뒤, 실제로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거꾸로 하나씩 찾아갔다.
그 상품만이 갖추고 있는 무엇인가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뭐, 이런 느낌이면 되지 않을까?” 가 아니라 “반드시 이런 느낌이어야 해.”라는 생각으로 만들어야 한다. 모든 일은 그렇게 처리해야 한다.
- 사토 다쿠, 『삶을 읽는 사고』, 안그라픽스
그러자 내가 생각하는 공간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브랜드들이 모이면서 하나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그 이미지를 뜯어보았을 때 공간의 방향성이 생기고 그 방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경험 요소들이 떠오른다. 처음으로 해 본 레퍼런스 짜깁기는 생각보다 빠르게 공간을 채워갔다.
이 사건 이후로 레퍼런스 짜깁기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학생 때 내가 싫어했던 짜깁기와 지금 하는 짜깁기는 다르다. 지금은 기획자로 일하며 쌓인 경험과 트렌드, 인터뷰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서로 연결된다. 그중 지금 상황에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을 골라 하나의 모습을 만든다. 이전 정구호 선생님이 일하는 방식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 공간과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을 먼저 구체적으로 그린 뒤, 작은 요소까지 하나씩 다듬으며 머릿속의 모습을 실제 공간으로 옮긴다고 했다.
결국 내가 그토록 기피하던 직감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말하는 직감은 아무 근거 없이 떠오르는 감은 아니다. 그동안 봐온 공간과 브랜드, 잘됐던 일과 실패했던 일, 인터뷰에서 들었던 말들이 계속 쌓여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지금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내가 말하는 직감은 그런 것이다.
결국 브랜드를 만드는 것에 정답은 없다. 데이터를 열심히 모으고 임직원들이 원하는 방향성을 찾아 브랜드를 구성해도 매출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고객에게 제대로 된 브랜드 경험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이전 나오토 후카사와는 이런 말을 했다. 제품 디자인을 할 때 완성된 제품이 어울리는 공간까지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환경적 요인과 주위의 분위기에 맞춰 지금 상황에 어울리는 것을 만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어울림을 만든다고 했다.
레퍼런스 짜깁기는 신기하게도 사고의 자유를 준다. 특히 공간을 브랜딩 할 때 이 공간이 어땠으면 좋을지 어떤 공간이 됐으면 좋을지를 상상하며 구성한다. 넨도가 컴포럭스를 디자인할 때 백화점이 아닌 즐겁게 걸을 수 있는 공원 같은 장소로 새롭게 해석한 것처럼 상상력을 발휘해 그 공간의 방향성과 역할을 공간의 상황과 맥락에 맞춰 바꿔버리는 것이다. 수많은 데이터를 클릭 하나만으로 찾아낼 수 있는 이 상황에서 데이터들을 다 읽고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해 결과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이 현재 브랜드 기획자와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능력이라 생각이 든다.
내가 오래도록 싫어했던 ‘레퍼런스 짜깁기’도 이제는 다르게 보인다. 예전에는 답을 먼저 정해놓고 그럴듯한 근거를 갖다 붙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하는 짜깁기는 그보다는 조금 다르다. 그동안 일하며 쌓인 경험과 데이터, 내가 좋다고 느꼈던 것들을 이리저리 붙여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머릿속에 하나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게 지금 상황에 어울리는지 다시 뜯어보고, 아닌 건 빼고, 부족한 건 다시 찾아본다.
AI는 나보다 훨씬 빠르게 자료를 찾고 가끔은 기가 막히는 결과물까지 만들어낸다. 이런 세상에서 브랜드 기획자는 뭘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더 많은 데이터를 찾는 능력은 아닐 것 같다. 오히려 이것저것 보고 경험한 것을 머릿속에 잘 쌓아두고, 필요할 때 꺼내 이리저리 짜 맞춰보는 능력 아닐까.
생각보다 비논리적으로 흘러가는 세상에서 모든 답을 논리적으로 찾아내려고 했던 내가, 요즘은 ‘레퍼런스 짜깁기’를 꽤 열심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