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는 작은 둠벙(전라도 방언)이 있다. 표준어로는 웅덩이라 부르는데, 농부들의 땀방울과 물을 모아두던 정겨운 간이 저수지다.
예전에 둠벙은 보물창고였다. 붕어를 낚고 우렁이를 잡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무엇보다 기다려지는 건 '연밥'이었다.
화려했던 연꽃이 지고 나면 찾아오는 선물. 한여름의 뼛속 깊은 무더위를 정면으로 받아내며 초록색 껍질 속 알을 꽉 채운 연밥은, 딱 이맘때쯤이면 달게 여물었다.
40년 전 그 시절에는 동네 골목마다 아이들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당연히 연밥이 보이면 너도나도 따겠다고 경쟁이 붙었다. 꼬맹이들은 둠벙 가장자리만 기웃거렸고, 제법 키가 큰 형들은 바지가 젖는 줄도 모르고 첨벙첨벙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더 크고 실한 놈들을 따내며 영웅이 되곤 했다.
오늘 아침, 둠벙가를 걸었다. 분홍빛 연꽃 사이로 연밥 하나가 시선에 들어왔다. 덜 여문 듯 풋풋해 보이면서도 제법 맛이 들었을 것 같았다. 조심스레 초록색 껍질을 벗겨내니 땅콩알만 한 뽀얀 열매가 드러났다. 입에 넣고 씹으니 톡 터지는 식감 뒤로 담백하고 정겨운 맛이 번졌다.
그리운 시절, 함께 둠벙을 누비던 친구들은 저마다의 삶을 찾아 멀리 떠났지만, 입안에 남은 연밥의 담백하고 고소한 맛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어쩌면 둠벙은 예나 지금이나 나에게 여전히 보물창고인가 보다. 어릴 적에는 풍성한 먹거리를 아낌없이 내어주더니, 마흔 해가 지난 지금은 가슴 시리도록 소중한 추억을 끊임없이 꺼내어 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