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5월 4일 자 인사 발령장엔 역시나 내 이름이 있었다. 22년 동안 온라인 게임을 다니면서 타지 발령을 두 번 받았다. 지금까지는 모두 인천이었다. 첫 발령은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던 해였다. 나는 야반도주하듯 밤눈을 뚫고 집을 나섰다. 아이들과 아내 얼굴을 보면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두운 고속도로를 홀로 달려가던 그때, 내 심정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다. 두 번째 발령 역시 참담하긴 매한가지였다. 아들이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였다. 북한군도 무서워한다는 '중2병'을 앞둔 아들과 초등학교 4학년 딸을 아내에게 온전히 맡겨둔 채, 4년이라는 세월을 주말부부로 보냈다. 아빠의 손길이 가장 필요했던 그 순간, 국가직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들과 아내에게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마음의 빚이 있다. 그래서 미안하면서도 고맙다.
이번 발령은 시작부터 결이 달랐다. 아들은 대학에 갔고, 딸은 아빠의 과한 관심이 부담스러워질 만큼 자랐다. 한결 마음의 짐을 던 나는 일요일 아침, 아내와 딸과 함께 여행을 떠나듯 부안으로 향했다.
옷가지와 단출한 살림살이 몇 개만 챙겨 들어선 관사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6층 빌라에서 5층이었다. 숨을 헐떡이고 짐을 들고 몇 번을 오르내렸다. 혼자였다면 금세 땀범벅이 되어 지쳤을 길을 아내와 딸이 함께 걸어주었다. 짐 정리를 대충 끝내고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시골집에 갔다. 주말마다 먼 길을 달려오지 않아도, 퇴근길에 언제든 들러 부모님과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연로하신 부모님 곁에서 함께 보낼 수 있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소중한 시간을 선물 받은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내와 딸을 고창 흥덕 버스터미널에서 배웅했다. 버스 창가 너머로 손을 흔드는 아내의 얼굴에는 서운함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멀어지는 버스를 바라보며 돌아오는 길, 이상하게도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예전에는 가족을 두고 도망치는 '죄인' 같았다면, 이제는 가족의 든든한 응원을 등 뒤에 업고 당당히 떠나는 기분이었다. 예전의 무겁고 짓눌리던 발걸음과는 확연히 다른, 낯설고도 기분 좋은 해방감이었다.
다시 혼자가 되어 돌아온 관사. 방구석구석을 쓸고 닦은 뒤 옷가지도 보기 좋게 걸어두며, 나만의 공간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첫 출근 날. 이번 임지에서 내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나만의 독립된 집무 공간인 '혼자 쓰는 방'이 주어졌다는 점이다.
방 문을 열고 들어가 바카라상 위에 놓인 내 이름 석 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난 22년 동안 치열하게 버텨온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따뜻하게 위로받는 듯했다. 긴 공직 여정 끝에 마주한, 참 기분 좋은 월요일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