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냈니, 거기서

by소선
27화. 잘 지냈니, 거기서.png




거실 테이블 위에 펼쳐 둔 일기장에 잉크가 완전히 말라 있었다. 방금 전까지 번들거리던 자리가 종이결과 같은 표정으로 가라앉아, 글씨가 종이에 붙어 버린 듯 보였다. 소선은 손바닥을 그 위에 올렸다가 천천히 떼었다. 손바닥의 온기가 종이 위로 얇게 남았고, 곧 공기와 섞여 사라졌다. 벽시계 초침이 또 한 칸 옮겨 붙었다. ‘착.’ 소리는 여전히 같은 높이였는데, 이번에는 테이블 위의 펜끝처럼 정직하게 들렸다.


서현은 소파 끝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한 번 쥐었다 풀고, 손가락을 접어 손톱 끝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창문으로 옮겼다. 소선은 그 움직임을 따라가듯 고개를 아주 조금 돌렸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공기가 움직였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던 찬 기운이 거실 바닥을 스치고, 테이블 아래를 지나, 소선의 발목을 한 번 건드렸다. 피부가 닿는 곳이 얇게 서늘해졌다.


소선은 일기장을 그대로 둔 채 일어섰다. 소파 옆 바닥에 내려놓았던 담요를 손가락으로 끌어 올려 접었다. 올이 손끝에 걸렸다가 풀렸고, 그 작은 저항이 몸을 현재에 붙여 주었다. 그는 담요를 소파 등받이에 가지런히 걸어 두고 주방 쪽으로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재가 아주 미세하게 울렸다. 서현의 시선이 잠깐 따라오다가 멈췄다. 소선은 “잠깐” 같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찬물을 한 컵 따랐다. 유리컵에 물이 부딪히며 작은 파문이 생겼고, 그 파문이 한 번 돌고 나서야 잦아들었다.


물을 몇 모금 삼키자 목구멍이 차가워졌다. 차가움이 내려가는 길을 따라 몸속이 한 번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소선은 컵을 싱크대에 내려놓고, 주방 옆 수납장 문을 열었다. 겨울 외투들이 걸려 있는 좁은 공간에서 옷감 특유의 냄새가 올라왔다. 세탁 후 말라 있는 섬유의 냄새, 오래 걸어 두어 생긴 금속 옷걸이 냄새가 섞였다. 그는 손을 뻗어 가장 안쪽에 걸린 짙은 색 외투를 잡았다. 소매 끝이 손목에 닿았다. 두꺼운 원단의 무게가 손끝으로 전해졌다.


외투를 꺼내 어깨에 걸쳐 보려다, 소선은 그대로 품에 안았다. 옷감의 따뜻함이 아니라, 안쪽에 갇혀 있던 체온의 잔향 같은 것이 가슴팍에 닿았다. 그는 그 무게를 느끼며 거실로 돌아오지 않고,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관 신발장 위, 집 열쇠 옆에 늘 두던 작은 손전등을 집었다. 손전등의 금속 몸체가 손바닥에 차갑게 붙었다. 차가움이 손바닥의 열을 빨아들이는 동안, 소선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숨이 밖으로 나가며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그는 서현 쪽을 돌아봤다. 서현은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시선만 올려, 소선의 품에 안긴 외투와 손전등을 한 번 훑었다. 묻는 말은 없었다. 소선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 사이로 벽시계 소리가 한 번 더 지나갔다. ‘착.’

소선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거실 끝에 있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작은 문 앞에 섰다. 실제로는 천장 가까이에 붙은 낮은 문이었지만, 그 앞에 서자 발밑이 한 칸 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손전등을 켜지 않은 채, 손바닥을 문손잡이에 올렸다. 금속이 차가웠다. 차가움이 손바닥을 타고 손목까지 번졌다. 그는 손잡이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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