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너를 데려가도

by소선
28화. 시간이 너를 데려가도.png




샤워를 끝내고 거울 앞에 섰을 때, 소선은 수건 끝으로 귀 뒤 물기를 한 번 더 훑었다. 욕실 환풍기는 낮은 숨처럼 돌아가고, 세면대 위에 떨어진 물방울이 천천히 모양을 바꾸다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는 습관처럼 손등을 들어올렸다. 손을 씻을 때마다, 로션을 바를 때마다, 문손잡이를 잡을 때마다 늘 시선이 닿는 자리였다. 예전엔 그곳이 먼저 눈에 걸렸다. 지금은 눈이 걸리기 전에 손끝이 먼저 닿는다.


엄지손가락으로 손등의 옅은 자국을 천천히 문질렀다. 굳은살처럼 솟지 않은, 살결 안쪽에만 남아 있는 흔적. 피가 나던 날의 냄새나 소리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때의 손등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뜨거움을 식히려 찬물 아래에서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 같은 감각만 얇게 남아 있었다. 억지로 지우려 했던 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손끝은 더 조심스러워졌다. 문질러 없애려 하면 오히려 피부가 붉게 일어났고, 멈추면 다시 평평해졌다. 자국은 남아 있으되, 더 이상 새로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 사실이 손끝에서 먼저 확인됐다.


욕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집 안의 공기는 겨울 끝자락처럼 서늘했다. 거실 쪽에서 벽시계 초침이 또박또박 움직였다. 한때는 그 소리가 시간을 밀어붙이는 것처럼 들렸는데, 오늘은 발걸음을 정해주는 박자에 가까웠다. 초침이 한 칸 넘어갈 때마다, 소선의 어깨도 아주 미세하게 내려앉는 느낌이 있었다. 그는 수건을 접어 세탁 바구니 위에 놓고, 서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닥은 맨발에 차가웠고, 발바닥에 닿는 결이 방마다 조금씩 달랐다. 거실에서 서재로 넘어가는 문턱은 낮았지만, 오늘은 그 낮음이 오히려 집이 오래된 물건처럼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현관 쪽에서 작은 마찰음이 났다. 신발장 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 닫히는 소리, 운동화 끈이 금속 고리에 닿는 가벼운 딸깍임. 서현이었다. 소선은 서재 문 앞에서 멈췄다가, 굳이 숨을 고르지도 않은 채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현이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발뒤꿈치를 넣기 위해 한 번 발을 들었다가 내려놓는 동작이 가볍고 빠르다. 예전처럼 발끝으로 바닥을 더듬지 않았다. 끈을 묶는 손도 급하지 않으면서 망설임이 없었다. 새 운동화가 아니라, 몇 번 신어 길이 든 운동화였다. 흰 고무 부분에 얇은 스크래치가 있었고, 그게 더 씩씩해 보였다. 서현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가방을 들어 어깨에 걸었다. 어깨가 굽지 않았다. 소선은 현관 센서등 아래에 서현의 그림자가 예전보다 짧게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빛의 각도 때문인지, 아이가 조금 자랐기 때문인지, 혹은 둘 다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림자가 더 위태롭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서현이 문을 열기 전에 한 번 뒤돌아봤다. 소선이 서 있는 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정도였다. 눈을 길게 맞추기엔 짧은 순간이었지만, 소선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는 손에 묻은 물기를 다시 확인하듯 손바닥을 한 번 쥐었다 펴고,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서현은 “다녀올게요”라고 말하진 않았다. 대신 문 손잡이를 잡는 손에 힘을 줬다. 금속이 삐걱이지 않고 부드럽게 돌아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도,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거칠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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