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주름은 어디에 머무는가

유한한 존재만이 빚어낼 수 있는 삶의 밀도에 대하여

by김은령


《 유한의 궤적 》 _ 그림부리 김은령





시간의 주름은 어디에 머무는가

유한한 존재만이 빚어낼 수 있는 삶의 밀도에 대하여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나는 점점 늙어가며 끔찍하고 흉측해지겠지. (…) 내가 항상 젊음을 간직하고, 이 그림이 나 대신 점점 늙어간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만 있다면 난 무엇이든 바칠 텐데. (…) 내 영혼이라도 바칠 거야!"



❝ 인간은 왜 자신의 주름을 지우려 하면서도, 예술 속에서는 그 흔적을 남기려 하는가. ❞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으며 묘한 이질감을 느낀 적이 있다. 영원한 젊음을 누리는 주인공 대신, 캔버스 속 초상화가 그의 세월과 비밀을 대신 짊어진 채 거칠고 추악한 주름을 새기며 늙어간다는 이야기이다. 유한한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예술로 전이되는 그 잔혹한 상상을, 문득 오늘날 우리 곁에 들어선 인공지능(AI)과 인간의 관계로 옮겨와 본다.


AI는 내가 건네는 수많은 말을 삼키고 방대한 지식을 쏟아내지만, 삶을 통과하며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기억까지 갖지는 못한다. 그것은 인류의 시간을 연결할 뿐, 단 한순간도 스스로의 시간을 살아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기쁨과 상실, 선택과 후회는 정제된 데이터의 조합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유한한 생을 관통한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나이테 같은 세월의 흔적이다.


기계가 기억의 층을 쌓아 올릴 때, 인간은 삶의 결을 빚어낸다. 그 깊이의 차이가 바로 '시간의 밀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우리는 삶이 응축된 신비한 주름을 지우기 위해 애쓰며 살아간다. 속도와 효율, 영원한 젊음만을 찬양하는 디지털 세상 속에서, 늙어감은 어느새 극복해야 할 결함처럼 취급받기 때문이다. 의학의 힘을 빌려 주름을 서둘러 지우고, 팽팽한 피부를 선망하며 도리언 그레이의 욕망을 닮아가려는 시대 속에서, 나는 문득 주름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주름은 단순한 노화가 아니다.


타협 없는 세월의 풍파 앞에서도 눈을 감지 않고 자신의 생을 끝까지 마주한 인간의 곧은 시선 위에, 시간이 새겨 놓은 마지막 증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와일드의 상상은 전복된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인간을 대신해 늙어주었지만, 현실의 우리가 기술을 통해 육체의 주름을 지워낸다 한들 그 기술이 우리 삶의 무게까지 대신 짊어질 수는 없다. 아무리 피부를 팽팽하게 가꾸어 노화를 감춘다 해도, 그 아래 깃든 실존의 고뇌와 시간의 흐름은 양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자신이 살아낸 진짜 시간을 캔버스 위에 직접 새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태어난 예술은 삶을 대리하는 가짜 초상이 아니다. 소멸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존재가 품어 온 시간의 결을 간직한, 또 하나의 주름진 얼굴이다.


주름은 결코 타인에게도, 기계에게도 양도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지워야 할 인생의 흉터처럼 여겨졌던 자취가, 예술 안에서는 비로소 지켜내야 할 실존의 흔적이 된다. 무한을 상징하는 기술의 시대에도 인간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은 우리가 한계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영원을 흉내 내는 장치가 아니라, 단 한 번뿐인 삶이 체화된 자취를 끝내 품어내는 일이다.


그리하여 시간이 인간의 온몸에 새긴 주름은 쉽게 휘발되지 않는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인간을 대신해 늙어갔지만, 현실의 인간은 자신의 몸으로 시간을 살아낸다. 비록 우리의 육체는 소멸할지라도, 삶을 통과하며 빚어진 시간의 밀도만큼은 예술 안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장 폴 사르트르 『구토』

❝ 멋진 주름살이다. 그는 그 모든 주름을 가지고 있다. 운이 좋은 사나이다. 그는 과거를 박제로 만든 것이다.❞




《 유한의 궤적 》 _ 그림부리 김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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