슛이 들어간 것과, 슛이 좋아진 것은 다릅니다

서머리그에서 돌아온 이현중의 인터뷰를 보다가

by나코리

보고가 유난히 잘 풀리는 날이 있다. 준비한 자료가 착착 넘어가고, 질문도 예상한 범위 안에서 나오고, 마지막에는 좋은 반응까지 듣는다.


오늘 자료 좋더라. 누가 만들었어?


한마디에 으쓱해진다. 이제야 회사 생활에 감을 잡은 것 같기도 하다. 내색은 안 하지만 그날 저녁은 기분이 좋다. 그러다 얼마 뒤 비슷한 자리에서 비슷한 자료로 무너지기도 한다. 질문을 연달아 대답하지 못하고, 회의실을 나오면서 등은 땀으로 젖어 있다. 일할 마음까지 사그라드는 날.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았어. 상무님도 기분이 별로였어.


잘된 날은 실력이라고 부르고, 안 된 날은 운이라고 위로한다. 나도 십수 년을 그렇게 살아온 것은 아닐까.


image.png출처: KBS 현장영상


01. 22점을 넣고도 아쉬웠다는 사람


어제 이현중 선수의 인터뷰를 봤다. NBA 서머리그를 마치고 대표팀에 합류한 참이었다. 한 경기에서 22분을 뛰고 22득점을 올렸다. 개인 최다 기록이었고, 그날 하이라이트는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기자가 기억에 남는 경기를 물었다. 나는 당연히 22점 경기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


제가 22득점 한 경기도 아쉬웠었고, 제가 못한 경기들도 아쉬웠었고.


잘한 날과 못한 날을 같은 칸에 넣어버린다. 여기서 영상을 한 번 멈췄다. 그다음 대답이 인상적이다. 22점을 어떻게 넣었냐는 질문이었다.


저는 그냥 똑같이 플레이했는데, 슛이 좀 더 잘 들어간 것뿐이고요.


처음엔 겸손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몇 번 다시 들으니 겸손이 아니었다. 대단히 정확한 자기 관찰에 가까웠다. 같은 동작, 같은 준비, 같은 판단이었는데 어떤 날은 공이 들어가고 어떤 날은 링을 맞고 튀어나온다. 들어간 슛의 개수는 그날의 결과지, 그 사람의 실력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날 내 보고가 잘 풀린 것도 실력이 아니라 그냥 슛이 들어간 것이었다. 얼마 뒤에 무너진 쪽이 진짜 내 실력일 수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image.png출처: KBS 현장영상


02. 잘된 날에는 점검을 안 한다


어떤 일을 오래 하면 생각하지 않고도 해내게 된다. 우리는 그 상태를 좋은 뜻으로 부른다. 손이 알아서 간다, 눈 감고도 한다, 저 사람은 프로다.


그런데 『1만 시간의 재발견』을 쓴 안데르스 에릭슨은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 익숙해져서 별생각 없이 해낼 수 있게 되는 그 순간, 실력은 거기서 멈춘다는 것이다. 우리가 숙련이라고 부르던 상태가 사실은 정지 지점이라는 말이다.


회사에서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다. 15년 차 김 부장의 보고서와 5년 차 시절 김 부장의 보고서를 나란히 놓아보면 된다. 10년 차이가 나야 정상인데, 대체로 그렇지 않다. 대신 10년치 요령이 쌓여 있다. 요령은 오늘의 성과를 지켜주지만 내일의 실력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점검을 잘된 날에는 하지 않는다. 결과가 좋았으니까. 결과가 좋으면 과정도 좋았다고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이건 내가 좋아진 건가, 아니면 오늘 슛이 잘 들어간 건가?


구분하는 방법은 하나뿐인 것 같다. 아무 도움 없이, 며칠 지난 뒤에, 다시 해보는 것. 그때도 나오면 실력이고, 안 나오면 그날 운이 좋았던 거다. AI가 초안을 대신 써주는 요즘은 이 질문이 더 매섭다. 결과물은 훌륭한데 내 실력은 제자리인 경우가 정말 많다. 너무 걱정스럽다.


image.png출처: KBS 현장영상


03. 안 쏘면 기록도 남지 않는다


인터뷰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후배 선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슛을 안 쏴서 안 들어가는 것과, 쏘고 안 들어가는 건 큰 차이거든요.


쏘고 안 들어가면 분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발이 밀렸는지, 릴리스가 늦었는지, 애초에 그 상황에서 던질 슛이 아니었는지. 그런데 안 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실패도 없고 정보도 없다. 회사원의 언어로 옮기면 안 쏜다는 건 이런 것이다.


- 잘 아는 주제만 맡는다

- 확실히 통과될 안건만 올린다

- 새로 배워야 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옆으로 흘린다

- 해본 적 없는 자리는 다음에 하겠다고 미룬다


이렇게 살면 실패 기록은 아주 깨끗하다. 대신 3년 전과 실력이 비슷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개인이 게을러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한곳에 오래 있는 쪽이 승진에는 유리하다. 아는 사람이 많아지고, 내가 뭘 했는지 기억해주는 사람이 생기고, 결정적인 순간에 끌어주는 것도 대개 그 안에서 나온다. 옮기면 그 자산은 두고 가야 한다.


그걸 알면서도 소속 조직을 계속 옮겼다. 올해는 5년 만에 AX(AI 전환) 조직으로 왔다. 유통관리, 영업기획, 전략실, 인재실에 이어 다섯 번째다.


이제 편하게 가셔도 되잖아요?


그 말이 맞다. 다만 한자리에 5년쯤 있으면 배우는 건 처음 2, 3년에 거의 끝난다. 그다음부터는 회의에서 어떤 질문이 나올지, 누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대충 알게 된다. 실수할 일이 없다. 마지막 2년 동안 새로 배운 것을 적어보라고 하면 종이 반 장이 안 나온다. 나는 승진보다 그쪽이 더 무서웠다.


이번 팀은 나보다 한참 어린 개발자들과 일한다. 업무 이야기보다 그들이 흘리듯 하는 트렌드 이야기에서 배우는 게 더 많고, 잘하면 개발도 좀 배울 수 있을까 기대해 본다. 그동안 쌓아둔 요령은 여기서 별로 쓸 데가 없는데, 그게 나쁜 소식만은 아니다.


이 선택이 잘한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공은 아직 공중에 있다. 다만 이번에는 쐈고, 안 들어가더라도 뭐가 부족했는지는 남을 것이다.


그러니까 질문은 '나는 실패가 두려운가'가 아니다. 진짜 질문은 이거다. 나는 지금 무엇을 쏘지 않고 있는가.


image.png출처: KBS 현장영상


04. 아쉬움과 자바카라은 다르다


여기까지만 읽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매 순간이 아쉽다'는 말을 잘못 가져오면 사람이 망가진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 무엇을 해내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 허기를 다음 성과로 메우려다 결국 방전되는 사람. 승진해도 기쁘지 않고, 잘해도 불안한 사람. 솔직히 나도 몇 번 그 근처까지 갔다.


그런데 인터뷰를 다시 들어보면 그 위험을 막는 장치가 같은 문장 안에 들어 있다.


매 순간 아쉬웠고, 또 매 순간 정말 즐거웠습니다.


아쉬움과 즐거움을 나란히 놓는다. 그리고 이번 여름의 성과를 말할 때 득점이 아니라 다른 것을 먼저 꺼냈다. 다시 한번 겸손해진 계기가 됐고, 부상 없이 마무리했으니 많이 성장한 것 같다고.


부상 없이 마쳤다는 걸 성장의 항목으로 센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오래 하는 사람만 오래 성장한다. 몸이든 마음이든 끝까지 굴리다 고장 나면 다음 시즌이 없다. 회사원도 다르지 않다. 3년 불태우고 번아웃으로 사라진 후배들을 여럿 봤다.


일에는 높은 기준을 들이대고, 자기 자신에게는 조건을 붙이지 않는 것. 이 둘이 같이 있어야 한다. 앞의 것만 있으면 소진되고, 뒤의 것만 있으면 그냥 위로가 된다.


자바카라은 결과를 자기 존재에 붙인다. 못했으니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결론 내리고 거기서 멈춘다. 아쉬움은 다르다. 아직 다 하지 못한 게 남아 있다는 감각이라, 다음 동작으로 이어진다.


image.png출처: KBS 현장영상


05. 안 되는 것은 잠시 접어둔다


계약 문제를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너무 생각 많이 하다 보면 사실 되는 것도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대표팀 훈련에서 부족했던 점을 보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낙천적인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주의를 어디에 둘지 선택한 것에 가깝다. 계약은 그가 어쩔 수 없다. 오늘 오후 연습의 강도는 어쩔 수 있다.


우리는 매일 반대로 산다. 인사평가, 조직 개편, 옆 팀 소문, 내 이름이 어느 회의에서 어떻게 불렸는지. 머릿속 8할을 그런 것들이 차지하고, 정작 오늘 실제로 만들 수 있었던 두 시간은 그냥 증발한다. 회사 밖에서 살아남는 능력은 그 두 시간을 지키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닐까.


선배,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정리하면 세 가지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망한 날이 아니라 잘된 날에 해야 한다.


A. 내가 좋아진 건가, 오늘 슛이 잘 들어간 건가.


좋은 결과를 만든 요인 중에 다음에도 반복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적어본다. 적을 게 없으면 그건 실력이 아니다.


B. 도구 없이 며칠 뒤에 다시 할 수 있나.


해냈다와 할 수 있다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C. 나는 지금 무엇을 쏘지 않고 있나.


실패 기록이 깨끗하다면, 잘하고 있는 게 아니라 던지지 않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인터뷰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매 순간이 아쉽기 때문에 계속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22점을 넣고도 아쉬웠던 사람과, 22점을 넣고 만족한 사람은 다음 시즌에 다른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앞사람은 아직 배울 게 남았고, 뒷사람은 그날로 학습이 끝났으니까.


image.png출처: KBS 현장영상


이 글을 쓰면서 최근에 꽤 마음에 들었던 결과물 하나를 떠올려봤다. 그리고 물어봤다. 이건 내가 좋아진 건가, 슛이 잘 들어간 건가.


솔직히 후자였다.


그래서 남은 하반기는 좀 더 던져보려고 한다. 안 들어가면 경험이라도 남을 테니까. (물론 안 들어가면 기분은 나쁘겠지?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