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와의 추억 이야기
"유준아, 예진아, 1층 냉장고에서 우유하고 계란 좀 가져다줘"
아침을 준비하던 남편이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네."
짧은 대답과 함께 사춘기가 시작되는 듯한 첫째는 귀찮은 표정으로 식사 재료를 가지러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애들도 좀 귀찮겠다."터덜터덜 내려가는 첫째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이 정도 심부름은 해야지." 남편은 아침을 준비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치, 이 정도 심부름은 해야지. 하는 게 맞지."
나 역시 남편 말에 동의하면서도 어린 시절 심부름 한 번 안 하고 컸던 내가 생각나 조금 미안해졌다.
할머니는 나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으셨다. 심부름은커녕 물 한 컵 내 손으로 떠다 먹은 기억이 없을 정도로 할머니는 나의 손과 발이 되어 주셨다.
"할머니 나 목말라."
한마디면 언제나 마법처럼 내 손에 따뜻한 보리차가 들려 있었고 내가 어딘가 다녀오면 배고플 새도 없이 언제나 따뜻한 간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해 주신 음식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단연 식혜였는데, 특히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식혜는 정말 일품, 별미, 말 그대로 꿀맛 중 꿀맛이었다. 할머니는 한겨울 언제나 식혜를 한 솥 끓여 베란다에 놓으셨는데 추운 겨울 살짝 언 식혜와 함께 따뜻한 군고구마를 먹을 때면 입 짧은 나도 몇 번을 더 달라고 할 정도로 맛이 좋았다. 내가 오죽 식혜를 좋아했으면 아빠께선 저녁을 남김없이 다 먹어야 식혜를 먹을 수 있다는 규칙까지 만들어 내가 밥을 다 먹게 유도하시곤 했다.
할머니가 만드신 식혜 맛의 비결은 아낌없이 들어간 쌀에 있었는데 정말 매번 숟가락으로 퍼먹어도 남을 정도로 쌀알이 많았다. 할머니가 한 솥 끓여 놓으신 식혜가 바닥을 보일 때쯤에는 식혜 국물보다 쌀알이 더 많았는데 그럴 때면 나는 달달한 국물만 날름 마시고 쌀은 모른 척 남겨 놓곤 했다. 아빠는 내가 편식하는 것을 나무라고 다 먹으라고 하셨지만 할머니는 그런 아빠의 눈을 피해 내가 남긴 식혜 쌀알을 몰래 먹어 주시곤 했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식혜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굉장히 복잡하고 힘들다. 일단 무거운 압력솥을 사용해야 하고 다 끓인 식혜가 식을 수 있도록 뜨겁고 무거운 솥을 베란다로 옮기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할머니는 내가 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그에 맞춰 식혜를 만들어 주셨는데,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도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을 때도 언제나 내가 오는 날짜에 맞춰 식혜를 만들어 주셨다. 심지어 거동이 불편해지시기 직전인 몇 년 전까지도 할머니는 엄마의 눈을 피해 나를 위한 식혜를 만들어 주셨다.
"어휴... 엄마! 무겁게 이걸 또 어떻게 했어. 정말 큰일 난다니까. 이제 이렇게 무거운 거 들고 하다 큰일 나."
"아냐 괜찮아! 하나도 안 무겁게 했어."
엄마는 박씨 고집은 말릴 수가 없다며 할머니 식혜를 병에 담아 내게 싸 주셨다. 증조할머니 식혜를 처음 맛본 우리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연신 식혜를 마셔 댔다.
"확실히 사 먹는 식혜랑 다르지?"
나는 자랑스러운 마음에 아이들에게 말했다.
"네, 엄마. 너무너무 맛있어요. 사는 거랑은 비교가 안 돼요!"
엄지를 척 올리며 마시는 아이들을 보자 어젯밤 할머니 말씀이 생각나 마음 한켠이 아려 왔다. 전날 저녁,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설거지를 하고 옆에 앉은 나를 보며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할머니 쓸모없지. 맨 놀고 먹고 자고."
"할머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할머니가 왜 쓸모없어?"
"맨 자고, 먹고, 놀고 일도 하나 안 하니 쓸모없지."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 낮잠 주무시는 것을 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우리 할머니는 평생 몸을 쉬지 않는 분이셨다. 쉴 시간이 있을 때면 바닥이라도 한 번 더 쓸고 식탁이라도 한 번 더 닦았다. 그렇게 평생을 부지런히 사신 분이, 손녀가 할머니 보러 왔는데 할머니가 대신 설거지를 한 게 마음이 쓰이셨나 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멕이고 입히고 키워 놨음 됐지.
할머니가 왜 쓸모없어. 할머니가 잘 키워 줘서 나 이렇게 잘 컸잖아.
이젠 내가 할머니한테 해 줘야지. 이제 내 차례지."
나는 할머니 손에 하얀 배를 포크에 푹 찍어 쥐여 드렸다. 거칠고 두꺼운 우리 할머니 손.
할머니 손을 보니 어린 시절 찐 밤을 좋아하던 나를 위해 손가락 마디에 물집 잡히도록 밤을 까 주신 기억이 났다. 할머니가 밤을 까는 속도보다 나와 언니가 깐 밤을 집어 먹는 속도가 더 빨라서, 할머니는 고개 한 번 들 새 없이 연신 밤만 까셨다. 할머니가 시골로 내려가신 후 찐 밤을 스스로 까먹을 때 비로소 딱딱한 밤을 까먹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얼마나 손가락이 아픈 일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외에도 할머니의 거칠고 두꺼운 손은 내가 지금 희고 부드러운 손을 가질 수 있게 나 대신 몇 배의 일을 했을 것이다.
그날 저녁 할머니와 배를 먹으며 옛날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할머니께 물었다.
"할머니는 왜 나한테 아무것도 안 시켰어? 심부름도 안 시키고, 설거지도 안 시키고, 심지어 밥도 매번 멕여 줬잖아."
"너무 이쁘니께. 너무 이쁘니께 그랬지." 할머니는 당연하다는 듯 말씀하셨다.
"안 힘들었어? 안 귀찮았어, 할머니는?" 내가 다시 묻자 할머니는 그때로 돌아간 듯 조용히 미소 띤 얼굴로 말씀하셨다.
"...귀하게 키우고 싶어서. 귀하게 커야 나중에 귀한 대접받을 거 같아서."
나는 할머니 말씀에 울컥 눈물이 올라와 애써 배만 연신 집어 먹었다.
나는 정말 귀한 대접을 받고 컸다. 부잣집 딸은 아니지만 난 정말 귀한 대접을 받으며 길러졌다고 자부할 수 있다. 혹시 내 손이 더러워질까, 혹시 몸에 작은 흠집이라도 날까 정말 고이고이 모셔지며 대접받으며 키워졌다. 그렇게 내가 대접을 받는 동안 할머니의 손은 거칠어지고 허리는 소나무처럼 굽어졌다. 나에게 귀한 대접을 해 주신 할머니는 이런 귀한 대접을 받아 보셨을까... 할머니를 생각하자 눈물이 쏟아져 흘렀다. 나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나 할머니가 귀하게 키워 줘서 귀한 대접받으면서 살아.
나 할머니 덕분에 귀하게 살고 있어.
할머니 너무 감사해요. 사랑해요."
우느라 할머니 얼굴도 보지 못하고 말하는 나를 보며 할머니는 활짝 웃으셨다.
"왜 울어 울애기. 그래야지 그럼! 우리 소임이 귀한 대접받고 살아야지! 이뻐 우리 강아지 최고루 이뻐."
그날 저녁, 나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울었다. 이 생에 내가 차고 넘치게 받은 이 사랑의 반의반만이라도 내가 할머니께 돌려 드릴 수 있을까? 이번 생이 아니면 다음 생에는 그럴 수 있을까? 만약 기회가 있다면 할머니께 내가 받은 사랑을 돌려 드리고 싶다.
할머니, 다음 생에는 내 딸로 태어나.
내가 할머니 귀하게 키워 줄게.
할머니가 해 준 것처럼 나도 할머니가 귀한 대접받으며 살 수 있게 정말 귀하게 키워 줄게.
할머니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