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자를 생각하면 은행과 돈부터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자에 반드시 화폐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봄에 곡식 열 섬을 빌려주고 가을에 열한 섬을 돌려받으면 됩니다. 빌려준 것도 곡식이고 갚는 것도 곡식이지만, 한 섬이 이자로 더 붙었습니다.
이자는 은행이 발명한 개념이 아닙니다. 화폐경제가 발달하기 전에도 사람들은 지금의 자원을 빌려주고 나중에 더 많은 것으로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고대 농경슬롯에서는 이자를 주고받는 거래가 상당히 자연스러웠습니다. 특히 춘궁기는 대출시장이 열리기 좋은 때죠.
농민에게 봄은 묘한 계절입니다. 지난해 수확한 곡식은 거의 떨어졌는데 올해 곡식은 아직 나오지 않습니다. 당장 배가 고프다고 종자까지 먹어버리면 문제가 더 커집니다. 오늘 굶는 것도 문제지만 내일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곡식이 남아 있는 사람과 곡식이 필요한 사람이 생깁니다. 그렇게 대출시장이 열립니다.
문제는 당장 곡식이 절박하게 필요한 사람일수록 신용도 역시 대개 낮다는 점입니다. 춘궁기에 먹을 곡식조차 떨어진 농민에게 빌려준 곡식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여름에 가뭄이 들 수도 있고, 홍수가 날 수도 있고, 병충해가 돌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농업이라는 산업은 골치 아픈 면이 있습니다. 흉작이 드는 해엔 한 사람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동시에 망할 수도 있거든요.
빌려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당연히 위험합니다. 그 위험을 감수하려면 더 많은 대가를 요구하고 싶어집니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신용위험에 대한 프리미엄입니다. 신용도가 낮을수록 이자율이 높아지죠. 가진 게 넉넉한 사람은 적은 이자로도 빌릴 수 있는데, 오늘내일 할 정도로 정말 궁핍한 사람은 비싼 이자로 빌려야 합니다. 이건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고국천왕 때인 194년, 진대법이 시행됩니다. 삼국사기에는 매년 3월부터 7월까지 나라의 곡식을 풀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가구의 사람수에 비례해서 곡식을 빌려주고, 겨울 10월에 갚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이걸 보통 빈민구제바카라이라고 배웁니다. 맞는 말입니다. 실제 기록에서도 고국천왕이 굶주린 백성을 보고 구휼을 명하는 장면이 먼저 나옵니다.
그런데 왜 국가가 나서서 곡식을 빌려줬을까요?
진대법의 구체적인 이율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예 이자를 받지 않았는지, 일정한 이자를 붙였는지도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민간에서 곡식을 구할 수밖에 없었던 농민들에게 국가가 직접 신용을 공급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국가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농민이 춘궁기를 견디지 못했다고 해봅시다. 결국 곡식을 가진 지방의 유력자에게 손을 벌립니다. 그런데 그해 농사가 또 망했습니다. 빚을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가진 것을 처분해야 합니다. 가장 큰 자산은 땅입니다. 땅을 잃고 남의 땅을 경작하게 되거나 유력자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농민 한 명이 땅을 잃으면 한 집안의 불행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수천 집에서 반복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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