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워지려고 돈을 썼는데 왜 다 똑같아질까?

"여름 쿨톤이시네요."

진단이 끝나면 추천 색상이 적힌 표를 받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휴대폰을 켜고 '여름 쿨톤 립'을 검색합니다. 비슷한 색의 화장품이 줄줄이 나오고, 잘 어울리는 옷 색깔과 피해야 할 색깔까지 정리돼 있습니다.

몇 개를 보다 보면 사고 싶은 것도 생기죠.


원래는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을 찾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검색창에는 이미 수많은 '여름 쿨톤'이 같은 립스틱을 추천받고, 비슷한 옷을 고르고 있습니다.


나를 좀 더 잘 알고 싶어서 시작한 일인데, 마지막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이름표를 달게 됩니다.

봄 웜, 여름 쿨, 가을 웜, 겨울 쿨 등등.


'퍼스널'컬러라는 이름치고는 꽤 몰개성한 단체생활을 하는 셈입니다.


나다워지려고 돈을 쓰는데, 왜 결과는 자꾸 비슷해질까요?




1. 나를 찾았는데 유형이 나왔다

사실 퍼스널컬러란 개념은 꽤 유용합니다. 얼굴에 어떤 색을 댔을 때 피부가 더 맑아 보이는지, 어떤 색은 유난히 칙칙해 보이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옷이나 화장품을 고를 때 꽤 유용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유형을 진단받고 나면 "나는 빨간색을 좋아해"라는 선호는 뒤로 밀리고 "내 톤에 빨간색이 맞을까?"라는 자기검열이 앞서게 되죠. 내가 검은색 옷을 좋아해도 진단 결과가 봄 웜이라면 베이지색을 검색하고, 립스틱을 고를 때도 내가 끌리는 색보다 '여름 쿨 추천템'을 먼저 찾아봅니다.


도구였던 분류가 어느 순간 취향보다 앞에 섭니다.


퍼스널컬러만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체형을 진단하고, 얼굴형을 분석하고, 향수 취향을 분류하고, 성격을 몇 개의 알파벳으로 설명합니다. 더 세밀하게 나를 알아가는 과정처럼 보이지만, 결과는 대개 몇 가지 유형 가운데 하나입니다.


나를 찾으러 갔는데 유형을 받아옵니다. 그리고 그 유형으로 다시 나를 설명합니다.


가장 익숙한 사례는 MBTI일 겁니다. 처음에는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성격유형을 검사했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는 "나는 감성적인 F니까 원래 이래"처럼 진단결과에 자신의 행동을 끼워 맞추기도 하죠.


자신을 설명하려고 받은 결과가 반대로 자신을 규정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이미지 보고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사실 이 컨텐츠는 제가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전 MBTI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만들었죠. '독립적이지만 나와 깊이 연결되는 사람'처럼 "A이지만 A가 아닌 면도 있는 사람" 형식의 문장을 먼저 만든 뒤, 마구잡이로 MBTI 유형을 배정한 것입니다.


그래도 웬만하면 그럴싸해 보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다정하고, 믿음직하고, 부담 없고,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그러니 누구에게나 들어맞을 적당한 문장을 먼저 만들고 성격유형은 나중에 갖다붙여도 웬만하면 "맞아! 나는 이런 사람이 이상형이었어!"라는 반응이 나오기 쉽습니다.


본래 내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MBTI일 텐데, 어느샌가부터 내가 무엇을 좋아해야 하는지 규정하기 시작합니다. 나를 설명하는 도구가 나 대신 결정을 내려주는 정답지가 되어버리죠.


기업 입장에서는 상품 추천과 소비로 연결하기 쉬운 장치로 보일 겁니다. 유형을 통해 '너는 이런 사람이니 이걸 구매하면 된다!'라며 소비자를 설득할 수 있으니까요.



2. 시장은 소비자의 개성을 얼마나 원할까?

모든 사람이 완전히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다면 기업 입장에서는 곤란합니다. 천만 명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천만 종류의 옷과 화장품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대량으로 만들고 팔려면 어느 정도 비슷한 사람끼리 묶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장은 오래전부터 소비자를 나눠왔습니다. 연령, 성별, 소득, 직업, 가족 형태처럼 비교적 눈에 잘 보이는 기준도 있고, 운동이나 캠핑처럼 어떤 생활을 즐기는지를 기준으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어떤 무리로 묶을 수 있으면 어떤 상품을 만들지, 누구에게 광고할지, 무엇을 함께 추천할지 결정하기가 쉬워집니다.


그래서 시장이 원하는 개성에는 묘한 조건이 붙습니다.

남들과 달라야 하지만, 너무 달라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완전히 제멋대로라면 대량으로 팔기가 어렵습니다. 반대로 모두가 똑같다면 새로운 상품을 팔 이유도 줄어듭니다.


시장 입장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소비자는 남들과 조금 달라지고 싶어 하면서도, 그 방법은 다른 사람들이 이미 하고 있는 것에서 찾는 사람일 겁니다.


차이는 필요합니다.

다만 그 차이가 분류 가능하고, 추천 가능하고, 복제 가능하면 훨씬 시장에서 팔기 쉬워집니다.



3. 이제는 나다움도 소비의 대상이다

사람은 물건을 기능만 보고 사지는 않습니다. 운동화는 걷거나 뛰기 위한 물건이지만, 어떤 운동화를 신는지는 때때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옷, 자동차, 음악, 가구도 비슷합니다.


소비와 정체성은 원래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사야 나다운지 생각합니다. 그래서 퍼스널컬러를 진단받고 그 유형에 맞는 화장품을 사고, 체형을 분석한 뒤 어울린다는 옷을 찾습니다. 향수도 단순히 좋은 냄새를 고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나를 표현하는 향'을 찾습니다. 진단하고, 유형을 정하고, 유형에 맞는 상품을 추천받고, 소비합니다.


이 과정이 강한 이유는 물건만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건과 함께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설명도 얻습니다. 사람은 물건에는 쉽게 질려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생각에는 꽤 충실합니다. 위에서는 주로 기업이 사람을 유형화한다는 방향으로 말씀드렸는데, 사실 소비자들도 유형화를 상당히 원하는 면이 있죠.


"나는 겨울 쿨톤이야."

"제 성격은 ENTJ입니다."

"저는 미니멀리스트이고 파이어족입니다."

같은 말을 사람들이 스스로 입에 올리는 까닭은, 시장이 정체성을 주입하는 면도 있겠지요. 하지만 한편으론 우리가 정체성의 불확실성을 견디기 싫어해서 시장에서 간편한 설명서를 사는 면도 있을 겁니다. 그게 누군가에겐 화장품을 사는 모습으로, 또 누군가에겐 MBTI 키링을 사는 모습으로, 또 다른 사람에겐 ETF 같은 금융상품을 사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죠.


어쩌다 한 번씩 달리는 사람이라면 운동화 한 켤레로 충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러너'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러닝워치가 보이고, 러닝복이 보이고, 러닝양말이 보입니다.


어쩌다 캠핑을 가는 사람과 자신을 '캠퍼'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장비 목록도 다릅니다. 소비자행동 연구에서도 사람이 자신과 연결해 받아들이는 정체성이 제품이나 브랜드 선택,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다뤄왔습니다. '운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정체성과 연결되는 물건과 행동에도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식입니다.


취미는 가끔 돈이 들지만, 정체성은 꾸준히 돈이 듭니다.

기업 입장에서 물건만 파는 것보다 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까지 함께 파는 것이 매력적인 이유입니다.




유행은 복제 가능한 개성입니다

사람은 남들과 다르고 싶어 합니다. 동시에 너무 다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독특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좋지만,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은 드뭅니다. 내가 입은 옷을 누군가는 알아봐 주기를 바라고, 내가 고른 취향을 누군가는 멋있다고 평가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유행에는 묘한 모순이 있습니다. 나다움을 표현하는 수단이면서도 다른 사람이 따라 할 수 있어야 유행이 됩니다. 혼자만 입을 수 있는 옷은 유행하기 어렵습니다. 검색했을 때 비슷한 사진이 나오고, 다른 사람도 같은 제품을 사고, 같은 방식으로 꾸밀 수 있어야 퍼집니다.


결국 유행은 복제 가능한 개성에 가깝습니다. 남들과 달라지고 싶어서 시작했지만,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달라집니다. 그렇다고 유행을 버리거나 퍼스널컬러 진단을 받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분류는 편리하고, 추천은 선택에 드는 시간을 줄여줍니다. 유행을 즐기는 것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다만 도구와 정답은 다릅니다. 내가 좋아하는 색보다 진단표가 우선하고, 내가 입고 싶은 옷보다 추천 목록이 우선하는 순간, 개성을 찾기 위해 만든 도구가 오히려 개성을 깎아낼 수도 있습니다.


시장은 우리의 개성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나답게 살라고 권합니다.

"당신만의 취향을 찾으세요."
"당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을 고르세요."
"남들과 다른 당신을 표현하세요."


하지만 그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글씨로 조건이 붙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분류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나답게 생활하세요. 우리가 추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나답게 표현하세요. 우리가 판매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나답게 뽐내세요. 기업에선 정답이 없다고 말하면서 선택지는 팔아줍니다.


마음껏 나다워져도 되는 세상입니다.

다만 요즘의 '나다움'에는 선택지가 있고, 그 선택지 아래에는 대개 가격표가 붙어 있습니다.




참고자료

삼성전자, BESPOKE 브랜드 메시지 및 광고, "가전에 취향을, 개성을, 변화를, 가전을 나답게."

Reed II, A., Forehand, M. R., Puntoni, S., & Warlop, L. (2012). "Identity-based consumer behavior." International Journal of Research in Marketing, 29(4), 310-321.

Berger, J., & Heath, C. (2007). "Where Consumers Diverge from Others: Identity Signaling and Product Domains." Journal of Consumer Research, 34(2), 121-134.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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