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래프트에서는 왜 화폐를 거의 쓰지 않을까?

저는 스타크래프트를 할 때 가장 먼저 광물을 캐는 명령부터 내립니다. 일꾼을 광물에 붙여서 자원을 사령부에 모으는 거죠. 그걸로 기지를 건설해서 병력을 훈련하고, 탱크를 만듭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25세기에 삽니다. 행성 사이를 차원이동으로 돌아다니고, 사람의 몸을 기계로 개조하고, 거대한 우주선을 만들어 전쟁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경제생활만 보면 석기시대 같습니다. 뭘 하든 일단 돌부터 캐니까요.


물론 스타크래프트 세계에도 화폐는 있습니다. 테란은 '크레딧'이라는 돈을 씁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시작되면 크레딧보다 중요한 것은 광물과 가스입니다.


단순히 게임을 만들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화폐를 조금 다르게 보면 이 설정이 의외로 그럴듯합니다.




1. 돈은 종이가 아니다

통장에 1억원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건 그저 전산망에 기록된 숫자일 뿐입니다. 내가 예치한 돈은 은행이 이미 누군가에게 대출해줬을 겁니다. 은행 금고 어딘가에 제 이름표가 붙은 현금 1억원이 따로 보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죠.


그런데 우리는 그 숫자를 꽤 진지하게 믿습니다. 내일도 은행이 문을 열 것이고, 송금 버튼을 누르면 돈이 이동할 것이고, 식당에서 카드를 내밀면 결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돈에는 보이지 않는 전제가 많이 붙어 있습니다.

정부가 존재해야 합니다. 은행이 작동해야 합니다. 결제망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계약을 어기면 법원이 집행해줘야 합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도 내가 가진 돈을 돈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5만원권이 5만원인 이유는 종이의 품질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5만원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은 아주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 꽤 많은 신뢰 위에 올라앉은 물건입니다.

평소에는 그 신뢰가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 잘 작동하고 있으니까요.



2. 전쟁은 신용을 시험한다

전쟁이 났다고 화폐가 곧바로 휴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가 강하고 행정체계가 살아 있다면 전쟁 중에도 사람들은 돈을 씁니다. 세금을 내고, 월급을 받고, 물건을 삽니다.


문제는 전쟁이 길어져 국가 자체의 신뢰가 흔들릴 때입니다.

이 정부가 내년에도 있을까? 은행에서 돈을 꺼낼 수 있을까?

지금 가진 돈을 다른 도시에서도 받아줄까?

정부가 전쟁비용을 마련하느라 돈을 너무 많이 찍지는 않을까?


평소에는 할 필요가 없었던 질문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답이 불안해질수록 사람들은 조금 더 단단한 것을 찾습니다.

자국 통화 대신 외화를 찾기도 하고, 금을 사기도 하고, 상황이 더 나빠지면 식량이나 연료 같은 물건 자체가 중요해집니다.


돈은 물건을 살 수 있을 때 강합니다. 그런데 돈으로 물건을 살 수 있을지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물건 자체의 가격은 올라갑니다. 전쟁은 돈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떠받치고 있던 신뢰를 시험합니다.



3. 광물은 꽤 좋은 지불수단이다

스타크래프트 세계는 이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성을 옮겨다니고 정권은 오래 가지 못하고 뒤집힙니다. 반란군과 자치령이 싸웁니다. 저그가 쳐들어오고, 프로토스는 필요하면 행성째 불태워버립니다.


25세기의 시선에서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는 간편결제 시스템을 보면 원시적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전쟁의 포화가 빗발치는 세상에서 테란 은행에 잠들어있는 10만 크레딧은 생각보다 불안한 재산이겠지요.


반면 광물은 설명하기 쉽습니다. 병영에 넣으면 해병에게 지급할 전투복과 총기가 되고, 군수공장에 넣으면 탱크가 되죠. 어느 정부가 발행했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앙은행이 망해도 상관없습니다. 어제 자치령 영토였던 곳이 오늘 반란군에게 넘어가도 미네랄의 성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실제로 스타크래프트2에서는 용병 미라 한이 크레딧이 아니라 광물을 대가로 병력을 빌려주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 세계에서 광물은 단순한 게임 UI가 아닙니다. 정말 지불수단으로 쓰입니다.


그리고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정부가 망해도 광물은 광물이기 때문입니다.




자원이 넘치는 세계에서도 돈은 사라질 수 있다

돈이 약해지는 길은 전쟁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반대 방향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미래에 AI와 로봇이 충분히 발전하면 돈이 지금과 같은 의미를 잃을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이 원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거의 무제한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다면, 돈으로 희소한 자원을 배분해야 할 필요 자체가 줄어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도 사라지지 않는 제약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에너지입니다.


머스크는 이를 두고 "에너지가 진짜 화폐"라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갑자기 전력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스타크래프트를 다시 보면 조금 묘합니다. 스타크래프트는 이미 오래전부터 미래의 경제를 두 개의 자원으로 압축해놓았습니다. 광물과 가스입니다. 즉, 물질과 에너지죠.


화폐는 생각보다 중요하진 않습니다.

전장에서는 화폐보다 실물자원이 훨씬 더 직접적인 제약으로 느껴질 테니까요.



아주 풍요로워도, 아주 망가져도 돈은 역할을 잃는다

머스크가 상상한 미래에서는 세상이 너무 풍요로워져 돈의 필요성이 줄어듭니다.

스타크래프트에서는 반대입니다. 세상이 너무 엉망이라 돈에 대한 신뢰가 줄어듭니다.

출발점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는 풍요의 끝이고, 다른 하나는 난세의 끝입니다.


그런데 둘 다 같은 곳으로 갑니다.

물질과 에너지입니다.


돈은 결국 현실에 있는 자원을 나눠 쓰기 위해 만든 추상적인 장부입니다.

슬롯가 안정되어 있을수록 이 장부는 편리합니다.

금괴를 직접 들고 다니는 것보다 간편결제 앱으로 숫자를 옮기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하지만 이 장부가 필요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지거나, 반대로 이 장부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슬롯가 망가지면 우리는 다시 실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다르게 보면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부가 내일도 존재할 것이라는 신뢰, 은행이 문을 열 것이라는 신뢰, 내가 가진 숫자를 다른 사람도 돈이라고 인정해줄 것이라는 신뢰입니다.


신뢰가 충분히 강한 시대에는 돌멩이를 굳이 창고에 쌓아둘 이유가 없습니다.

숫자 몇 개면 됩니다.


그러나 스타크래프트의 우주세계에서는 그 숫자를 믿기에는 조금 험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25세기에도 광산으로 가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자료

Bank of England, Money in the modern economy: an introduction

Bank of England, What is money?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스타크래프트Ⅱ: 자유의 날개 캠페인 "비열한 항구"

Nikhil Kamath, People by WTF: Elon Musk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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