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게란찜
1998년 3월 31일 화요일
날씨 맑음
오늘 게란찜을 먹었는대 세번이나 밥을 말아먹었다 나는 그래서 배까지 먹었다. 나는 기분이 너무너무 좋다. 진짜 오늘은 속이 시원하다. 오늘은 밖애 너무너무 추웠는대 집에 있으면 따숩다
첨삭
오늘 계란찜을 먹었는데 세 번이나 밥을 말아 먹었다. 나는 배까지 먹었다. 나는 기분이 너무 좋다. 진짜 오늘은 속이 시원하다. 오늘은 밖이 너무 추웠는데 집에 있으면 따숩다.
이날 일기에는 별일이 없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계란찜에 밥을 말아 먹었고, 배를 먹었고, 밖은 추웠고, 집은 따뜻했다. 유일한 고난이 있다면 선생님이 일기를 쓰라고 했다는 것이다. 쓸 이야기는 없는데 일기장은 채워야 한다. 그래서 여덟 살의 나는 분량과의 싸움에 들어간다. 밥은 그냥 먹은 게 아니라 '세 번이나' 말아 먹었고, 기분은 그냥 좋은 게 아니라 '너무너무' 좋았으며, 밖은 추운 게 아니라 '너무너무' 추웠다. 원본을 보면 글씨도 다른 날에 비해 유난히 크다. 내용이 부족하면 부사를 늘리고 폰트를 키우는 법이다. 1998년에도 분량을 채우는 기본 전략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담임선생님도 내 잔머리를 눈치 채셨는지 '글씨를 잘 쓰라'며 코멘트를 다셨다.
현직 교사가 되어 아이들의 글을 읽다 보면 이런 글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아이에게는 특별한 일이 없는데 어른은 자꾸 무언가를 쓰라고 한다. 그러면 '재미있었다'가 '정말 재미있었다'가 되고, 그래도 부족하면 '정말정말 재미있었다'가 된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에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밖에 너무너무 추웠는데 집에 있으면 따숩다"는 문장은 꽤 마음에 드는 문장이다. 아이 입장에선 어떻게든 한 줄 더 채우려고 쥐어짜낸 문장이었겠지만, 바깥세상에서 느꼈을 추위와 집안에서 느꼈을 따수움이 대조되는 부분이 마음에 든다.
이렇게 3월의 마지막 날도 무사히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