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호수와 홍학

여자 혼자 떠나는 남미 여행

by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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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는 정말 분홍색이었다.

홍학이 빽빽하게 모여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줄 알았는데, 물 자체가 분홍빛이었다. 역시 플랑크톤이었다니까. 눈앞의 풍경을 보고도 굳이 혼자 뿌듯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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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홍학도 꽤 많았다. 호수를 덮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디를 봐도 긴 목과 가느다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한쪽 다리를 들고 서 있는지 궁금해서 한참 지켜봤다. 어떤 녀석은 한 발을 들고 있었고, 어떤 녀석은 두 발로 서 있었다. 걸을 때는 양쪽 다리를 쫙쫙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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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일인데도 조금 뜻밖이었다. 한 발로 서 있는 모습을 마치 홍학의 기본 자세라 생각한 탓인지, 움직일 때도 어떻게든 한 발을 들고 있으리라 기대해 버린 걸까.


강렬한 분홍빛 사이로 어두운 푸른빛이 드문드문 보였고, 가장자리에는 자갈처럼 보이는 하얀 것들이 깔려 있었다. 그 앞에서 라마는 풀을 뜯고 있었다. 분홍 호수와 홍학을 배경으로 태연하게 풀을 뜯는 모습이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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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가는 길에는 모래 위로 김이 피어올랐다. 땅속에서는 지열이 뿜어져 나온다고 했다. 신기한 풍경은 계속됐지만, 내 코는 슬슬 한계였다. 건조한 데다 비염 때문에 자꾸 비볐더니 코는 헐고 인중에는 뾰루지가 났다. 차까지 사정없이 덜컹거렸다. 범퍼카가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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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짐을 내리기도 전에 방부터 배정받았다. 원래는 두 명이 한 방을 써야 했지만, 함께 온 어르신들이 배려해 주신 덕분에 혼자 쓰게 됐다.


일단 방은 생겼고, 다음은 저녁까지 얼마나 시간이 남았는지 알아내는 게 문제였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려면 번역기가 필요했다. 나는 숙소 직원에게 달려가 와이파이부터 물었다. 당연히 공짜일 거라 생각했던 나. 하지만 와이파이를 묻자, 돌아온 대답은 심플했다.

"10볼리비아노."

와이파이도 돈을 받는구나……. 그래. 여기까지 왔으니 어쩔 수 없지. 아까 온천 입장권을 사고 거슬러 받은 20볼리비아노를 내밀었다. 그런데 직원이 지폐 한가운데의 살짝 찢어진 부분을 가리키며 받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아니, 나도 이걸 거스름돈으로 받은 건데. 속상한 마음이 불쑥 솟았지만, 어쩔 수 없지. 결국 100볼리비아노짜리를 꺼냈다. 와이파이 하나 쓰겠다고 큰돈을 깨고 나니 괜히 더 억울했다.

돈을 낸다고 바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접속하면 잠긴 페이지가 뜨고, 그 화면을 직원에게 보여주면 직원이 직접 정보를 입력해 주는 방식이었다. 아주 철두철미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겠지. 그 과정을 다 마치고 나서야 번역기를 켤 수 있었는데, 정작 가이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저녁 시간을 물어보려고 바쁘게 움직였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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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돌아오자 일행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분이 찾아왔다. 그분은 가이드 조니에게 나를 영어를 쓰는 그룹으로 옮겨 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고 했다. 같은 업체에서 출발한 차는 두 대였는데, 내가 탄 차에는 함께 여행 온 여성 다섯 분이 있었고, 다른 차에는 이탈리아에서 온 커플과 호주에서 온 친구 두 명이 있었다. 내가 속한 그룹과 옆 그룹은 같은 투어사에서 운영하는지 일정도 숙소도 같았다. 다만 우리 그룹에서는 다들 스페인어만 썼고, 옆 그룹은 그나마 팀원들끼리 영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그쪽에서 하루를 보내는 게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드셨겠지.

……뭐, 나는 스페인어 그룹에 있어도 괜찮았는데.

물론 내 쪽에서만 괜찮았을 수도. 매번 번역기를 켜거나 눈치를 살피는 나를 보며, 그분들도 제법 답답하셨을지 모른다. 어쨌든 내가 부탁하기도 전에 다른 그룹으로 갈 수 있는지 물어봐 주셨다는 게 감사했다.

어떻게 감사를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제미나이로 감사 인사를 번역해 두었다. 영어로 Thank u를 하는 것 보다 TMI라도 스페인어로 준비해서 말하는 게 더 낫겠지.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해두고 저녁 식사를 기다렸다.


그렇게 몇 시간 뒤, 드디어 저녁 식사 시간. 자리에는 일행이 모두 모였다. 나는 준비해뒀던 번역기의 음성을 틀었다. 너무 오바하는 건 아닌가 살짝 고민은 됐었지만, 다행히 다들 좋아해 주셨다. 하고 싶은 말을 미리 적어 두고, 기계의 입을 빌려서라도 전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지.

그 와중에 사람들은 내 옷차림을 신기해했다. 반팔에 반바지, 위에는 재킷을 걸치고 있었는데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그냥 적당해서 입은 건데, 다들 두꺼운 외투를 챙겨 입은채 나보고 장난스레 “Crazy!”하며 질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실내가 막 춥지는 않았는데. 잘 때는 상황이 달라지긴 했지만.

밥은 나쁘지 않았다. 확실히 투어를 하면 어느 나라든 밥은 잘 챙겨준다. 맛은 별개지만, 적어도 굶기지는 않는다. 다행히 이번에는 맛도 나쁘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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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방에 누워 있자 조니가 따뜻한 물주머니를 가져다주었다. 찾을 때는 보이지도 않더니,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그는 내일부터 영어를 쓰는 그룹과 함께 다니면 된다고 말하며 씩 웃었다. 그동안 말이 통하지 않아 불편했는데, 막상 다른 그룹으로 옮기게 되자 그와 조금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완전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나저나 물주머니는 품에 안으니 참 좋았다.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있어도 따뜻한 건 또 따뜻한 대로 좋았다.

다만 물주머니를 안고 누워 있으니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나, 영어도 그렇게 잘하지는 않는데.

스페인어를 못한다는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제는 영어를 얼마나 못하는지 새로 보여 줘야 했다. 고맙고 안심이 되면서도 조금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지금까지 어떻게든 해 오지 않았나. 내일의 영어는 내일 어떻게든 해 보자.


그렇게 난 따뜻한 물주머니를 품에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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