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떠나는 남미 여행기
시위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고 슬쩍 뒷걸음질 쳤다. 그런데 경찰로 보이는 사람들도 꽤 많았고, 다른 사람들은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저렇게들 지나가는데 괜찮겠지. 고민 끝에 나도 사람들 사이에 끼어 걷기 시작했다. 동양인이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 오랜 주민 바이브로.
그렇지만 걷는 내내 갈등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그냥 갈까? 시위가 곧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렇지만, 끝내 앞서 걷는 사람들의 태연한 뒷모습을 보며 발을 옮겼다. 여러분, 저 여러분 믿고 갑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문제는 그렇게 심장을 쫄려가며 도착한 카사 로사다, 그러니까 대통령궁을 견학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 들어가려고 얼마나 용기를 냈는데!
솜사탕 씻은 너구리처럼 주변을 배회했다. 그러다 경찰들이 갑자기 몰려드는 바람에 혼자 또 쫄아서 산텔모 시장으로 급히 방향을 틀었다.
산텔모 시장에는 확실히 관광객이 많았다. 입구부터 SNS에서 인기를 끌 법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종을 치면 와인을 주는 모양이었다. 나도 한번 해보고 싶었지만, 앞사람들의 사진 촬영이 끝날 기미가 없었다. 기다리다가 포기했다. 어쩔 수 없지.
시장 자체는 유럽이나 튀르키예에서 보던 실내 시장의 축소판 같았다. 여기서 뭔가 먹어볼까 싶었지만, 이미 카페를 다녀온 뒤라 배가 불렀다. 가게들을 조금 더 기웃거리다가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다음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라틴아메리카 미술관, MALBA. 라틴아메리카 거장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중 한국에서 가장 익숙한 이름은 아마 프리다 칼로가 아닐까. 두 눈썹이 이어진 자화상으로 유명한 그 프리다 칼로.
나도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보러 갔다. 그런데 막상 빠져든 것은 레메디오스 바로라는 작가의 그림이었다. 레메디오스 바로의 그림에서는 묘한 기운이 났다. 오래 보고 있으면 정신이 조금 이상해질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묘함이었다. 편안한 느낌의 그림은 아니었지만, 자꾸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렇게 그림 앞에 한참 서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그림을 감상 한 뒤, 숙소로 돌아가는 우버 안에서는 기사님이 자꾸 “치노?” 하고 물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자 이번에는 다른 단어를 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일본인이냐는 뜻이었던 것 같다. 구글에 검색해 본 뒤에야 “코레아”라고 정정해 드렸다.
스페인어…… 어려워.
여러분은 남미에 가신다면 꼭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가시길. 참고로 나는 요새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듀X링고로 매일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다. 다음에 다시 간다면 그때는 꼭 당당하게 말하리. 일단 한국인이라는 것부터.
"Yo soy coreana"
저녁에는 스테이크를 먹기로 했다. 아르헨티나까지 왔으니 한 번쯤 먹어봐야 할 것 같았다. 문제는 내가 스테이크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혼자 여행하면 누구와도 상의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지만, 나 자신과의 협상은 남아 있었다. 이쪽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이성이: 아르헨티나까지 왔는데 대표 음식은 한 번 먹어봐야지.
감성이: 아니, 나 스테이크 별로 안 좋아한다고.
이성이: 그래도 여기까지 왔잖아!
감성이: 맛 없는 식사로 돈 날리고 싶어?
……결국 이성이가 이겼다. 블로그에서 본 사진이 제일 마음에 드는 유명한 스테이크집을 골라, 우버를 불러 호기롭게 갔다.
하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기자 명단이 이미 다 찬 상태. 더 일찍 올걸. 이렇게 일찍 와야 하는 줄 알았으면 숙소에서 서둘러 정리하고 나왔을 텐데.
사실 그렇게까지 먹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저녁 메뉴를 정할 때만 해도 나를 설득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그런데 못 먹는다니 먹고 싶어졌다. 블로그에서 봤던 고기가 뒤늦게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맛있겠지? 명단에 이름을 적어둔 사람들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팔레르모 소호를 멍하니 걷다가 다시 차를 불러 숙소로 돌아갔다. 누구 눈치도 볼 필요 없고, 누구와 다툴 일도 없는 혼자만의 여행. 그런데 하루 종일 감성이와 이성이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느라 바빴다.
돌아갈까, 그냥 갈까. 먹을까, 말까.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감성이가 또 말을 걸었다.
- 그러게, 스테이크 좀 일찍 먹으러 가지.
아까 싫다며.
그리고 그날 밤, 이 여행에서 감성이가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일정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