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정훈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멈추었다. 바카라상 위 전화기가 울리고 있었다. 사내 메신저가 아니라 내선 전화였다.
"조 과장, 지금 내 자리로 와."
박기현 상무의 목소리는 짧고 낮았다. 평소 정훈에게 말할 때의 편안한 반말과는 다른, 공적인 호칭과 톤이었다. 해외법인 인사팀 상무 박기현은 정훈의 전 사수이기도 했다. 한국 본사에서 함께 일했던 시절, 정훈에게 보고서의 기본, 회의 자세, 그리고 조직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정훈이 입사 3년 차에 첫 프레젠테이션을 했을 때, 발표가 끝난 뒤 복도에서 '잘했다'고 어깨를 툭 쳐준 사람도 박 상무였다.
15년 전의 어느 겨울 저녁이 떠올랐다. 정훈이 야근을 하며 초과 근무 일지를 쓰고 있을 때, 박 상무가 사무실에 남은 막내를 데리고 나갔다. 부천 사업장 근처의 김치찌개 집.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뚝배기를 사이에 놓고 기현은 소주 한 잔을 따랐다.
"정훈아, 조직에서는 두 가지만 기억해. 첫째는, 정직. 둘째는, 거리. 네가 잘하는 것은 다 알리되, 남의 부탁에는 거리를 둬. 특히 가족 이야기를 앞세우는 부탁에는 더욱 신중해야 해."
그때 정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 이야기'라는 단서가 그때는 와닿지 않았다. 가족이 왜 부탁의 방패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로 인해 가족이 흔들리고 나서야 그 단서가 가장 무서운 단어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법인 주재원 부임 초기, 기현이 정훈을 법인 식당의 구석 자리로 불러 한 말도 같은 맥락이었다.
"여기서는 가족이 먼저다. 회사는 두 번째야. 순서를 바꾸면 회사도, 가족도 다 잃어."
정훈은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몇 년 전 박 상무가 베트남 법인으로 자리를 옮긴 것을 정훈은 부임 후에야 알았다. 첫 만남에서 박 상무는 "네가 올 줄 몰랐다"며 반가워했다. 그 반가움이 지금은 다른 색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정훈은 사무실 문 앞에서 노크를 하기 전, 잠시 손가락을 모아 쥐었다. 똑, 똑.
"들어와."
박 상무의 사무실은 법인 건물 3층 코너에 있었다. 창문으로 공장 부지와 그 너머의 호치민 외곽 풍경이 보였다. 바카라상 위에는 서류 파일 세 개와 노트북, 그리고 커피 머그잔이 놓여 있었다. 머그잔의 커피는 식어 있었다. 박 상무는 안경을 쓴 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정훈이 들어오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앉아."
정훈은 의자에 앉았다. 등이 의자에 닿는 순간, 등판과 가죽 사이에 얇은 막 하나가 끼어 있는 듯 불편했다. 박상무는 안경을 벗으며 미간을 문질렀다. 피곤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정훈아, 솔직하게 말해. 강민석이라는 사람 알아?"
"…네. 동생의 사업 파트너입니다."
"동생? 너 동생이 여기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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