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석과의 식사 이후 한 달이 지났다. 정훈의 일상은 다시 궤도에 올랐다. 법인에서는 라인3의 불량률 문제가 해결되며 정훈의 평가가 좋아졌고, 본사 김 부장에게도 칭찬 메일을 받았다. 아이들의 학교 생활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민서는 학교 연극에 캐스팅되었고, 민재는 여전히 조용했지만 최소한 아침마다 학교 가기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덮어진 정훈의 거짓말 위에 평화가 싹트고, 이내 자라고 있었다. 현주도 호치민 생활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주재원 맘들과의 교류가 늘었고, 레지던스 지하 쇼핑몰의 요가 스튜디오에 등록하기도 했다. 무이네 여행 이후 가족의 공기가 조금은 가벼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공기가 어디서 왔는지, 현주는 몰랐다. 그래서 정훈은 방심했다. 다시 연락이 온 것은 수요일 오후였다. 이번에는 태훈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목소리에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형, 미안한데 한 건만 더 부탁할 수 있을까?"
정훈은 사무실 복도에서 전화를 받았다. 복도 끝 창문 너머로 공장 지붕 위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또?"
"이번에는 좀 급해. 기한이 있어서. 다음 주 화요일까지 서류가 들어가야 하는데…"
"태훈아, 나 지난번에 딱 한 번이라고 했잖아."
"알아, 형. 근데 이번 건은 진짜 급해. 민석이 형이 거래처한테 약속을 해버렸는데, 서류가 안 되면 위약금을 물어야 한대. 그러면 나한테도 불똥이 튀고…"
태훈의 말이 빨라졌다. 숨을 제대로 고르지 않고 말하는 듯, 문장 사이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끼어들었다. 적어도 태훈은 진심으로 쫓기고 있었다. 그리고 정훈은, 진심으로 쫓기는 사람을 외면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 위약금이 얼마나 되는데?"
"많아. 형, 나 아직 빚도 다 못 갚았잖아. 이거 잘못되면 진짜… 나 다시 도망가야 할지도 몰라."
'다시'라는 단어가 정훈의 가슴 한가운데에 작은 못을 박았다. 한 번 도망친 사람의 '다시'는 처음 도망치는 것보다 무거웠다. '다시 도망간다.' 그 말이 정훈의 가슴을 찔렀다. 7년 전, 태훈이 사라졌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은숙의 전화, 길준의 침묵, 그리고 채권자들이 집 앞에 서 있던 장면이었다. 다시 그런 일이 반복된다면 어떻게 될지 정훈은 상상해봤다. 숨이 막혀온다.
"태훈아, 나 오늘 서명 못 해. 우선 너부터 좀 보자. 네 집이 어디야?"
"…내 집? 왜."
"가서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정훈은 평소보다 한 박자 짧게 말했다. 짧게 말하면, 마음이 흔들릴 자리가 줄었다.
"형, 지금 바빠. 그냥 서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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