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석의 서류는 다음 날 오전 이메일로 도착했다. 정훈은 퇴근 후 레지던스 서재에서 서류를 열어보았다. 현주와 아이들이 거실에서 TV를 보는 소리가 문 너머로 들렸다. 정훈은 서재 문을 닫고 노트북 화면에 집중했다. 한식당에서의 점심이 그날 하루의 모든 시간을 천천히 짓누르고 있었다. 수출 품질 확인서의 형식은 깔끔했다. 제품명, 규격, 수량, 수출국, 수입국. A4 한 장짜리 서류에 빈칸 몇 개를 채우고 하단에 서명하면 되는 구조였다. 정훈이 회사에서 수백 번 봐왔던 형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품은 세광전자의 소형 가전 부품이었다. 모터 컨트롤러와 전원 모듈. 정훈의 부서에서 직접 다루는 품목은 아니었지만, 세광전자 제품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규격 코드도 세광의 체계와 일치했다. 그러나 규격 코드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 가지 미묘한 점이 있었다. 세광전자의 정식 모델 번호는 맨 뒤에 제조 공장을 식별하는 두 자리 코드가 붙는다. 부천 공장은 '12', 수원 공장은 '04', 광주 공장은 '07' 이었다. 그런데 이 서류에 적힌 번호는 '88'로 끝나고 있었다. 정훈은 '88'이라는 코드를 본 적이 없었다.
'신설 공장인가. 아니면 해외 OEM인가.'
정훈의 머릿속에 의문이 잠깐 스쳤다. 정훈은 그 의문을 자세히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의심은 더 이상 정훈의 일이 아니었다. 정훈은 볼펜을 들었다가 한 번 내려놓았다. 바카라상에 부딪히는 소리가 둔탁했다. 지갑을 꺼냈다. 지갑 안쪽 칸, 현금 뒤에 접혀 있던 종이 한 장을 꺼냈다. 7년 전의 ATM 출금 취소 영수증. 날짜는 흐릿했지만 글자는 읽혔다. '거래 취소 — 20,000,000원.' 종이는 너무 오래 접혀 있어서 접힌 자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7년 전, 태훈이 부천 아파트 현관 앞에 서 있었을 때. 정훈은 태훈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ATM으로 내려가 카드를 넣고, 금액을 찍고, 확인 버튼 앞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다음 주가 정훈의 승진 심사였다. 그 돈을 들키면 아내에게 설명이 복잡해질 거라는 계산이 먼저 들었다. 복잡한 상황에서 승진 심사에 영향이 가진 않을지 우려되기도 했다. 정훈은 '취소' 버튼을 눌렀고, 집으로 올라가 문을 열지 않은채 인터폰으로 말했다. "태훈아, 나 지금 못 도와줘. 미안하다." 인터폰 너머로 잠시 침묵이 있었고, 태훈은 대답 없이 1시간을 기다리다 돌아섰다. 그 영수증을 정훈은 그 밤 쓰레기통에 버리지 못했다. 지갑 안쪽에 넣어두었다. 왜 넣어두었는지, 7년간 자신도 몰랐다. 정훈은 영수증을 바카라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서류를 놓았다. 그 두 장의 종이가 같은 바카라상 위에 놓였다. 한쪽은 거절의 증거, 한쪽은 응답의 요청. 7년이라는 시간이 두 장의 종이 사이에 얇게 깔려 있었다. 정훈은 부탁을 거절했던 자리에서, 거절할 자격을 잃은 자리로 옮겨와 있었다.
정훈은 영수증을 다시 지갑에 넣었다. 그리고 서명했다. 자신의 이름. 직급. 날짜. 볼펜 끝이 종이를 누르는 감각이, 7년 전 ATM의 '취소' 버튼을 누르던 감각과 같은 무게로 손끝에 남았다. 서류를 스캔해서 민석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발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정훈의 검지 끝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정훈은 그것을 무시했다. 그것이 두 번 다시 떨리지 않게 하는 방법이었다. 답장은 30분 만에 왔다.
「형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
'깔끔하게'라는 것이 처음 보는 단어처럼 낯설게 읽혔다. 점심에 들었던 '정보를 드릴 뿐입니다'와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단어였다. 그리고 몇 분 뒤, 태훈에게서도 메시지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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