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규칙만 지키면 답이 나오는 수학이 뒤끝 없이 깔끔하니 편하고 좋았다. 답이 없는 일상에서 혼돈이 없기에 바카라을 좋아했고 공부를 좋아했던 것 같다. 경쟁으로 일등이나 우등생이 되고 싶어 공부한 것은 아니다. 딱히 다른 할 게 없어서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공부이어서 공부를 했다. 따로 시간을 내어 공부한 것은 아니다. 수업시간에 집중만 해도 우등생은 거저먹기였다.
그렇게 자신의 위치를 마크하고 룰루랄라 지내던 어느 날 머릿속에 차곡차곡 들어오던 규칙들이 자리를 지키지 않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오후 수업이었던 것 같다. 햇빛이 강하게 교실에 비쳐 들어오는 바람에 그 햇빛을 피하며 칠판에 있는 내용을 노트에 베껴 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나에게만 회오리바람이라도 불어 제친 것처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글자들이 낱자들로 분해되어 여기저기 흩어져갔다. 뭔가 잘못 보았나 싶어 아무리 눈을 비비고 살펴도 글자 낱자 형태만 보일뿐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간신히 사라지려는 몇몇의 의미들을 붙잡아 단어로 주저앉혀 보았지만 언제 흩어질지도 모르겠고 그 불안 때문에 문장을 형성할 수도 없게 되었다.
한마디로 처음 글자를 읽힐 때처럼 모든 낱자들이 날아가는 종이장처럼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처음엔 약하게 흔들려 붙잡아지기도 했지만 이젠 사방으로 제멋대로 휘돌아 다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머릿속에 들어 있던 지식들이 그대로 뒤섞여 혼잡을 이루고 있다. 내가 미쳐가나.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사방을 둘러본다.
아무 일도 없는 것인지 모두들 차분하게 사각사각 필기하는 소리와 칠판과 노트를 번갈아 쳐다보는 차분한 고갯짓만 있을 뿐이다. 그나마 이 지식으로 우등생으로 학교나 가정에서 존중을 받아오고 있었는데 그 위치가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 위치가 무너지면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도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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