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에서 일하면서 투자를 받기 위해 벤처캐피털 VC 앞에서 기업 설명을 하던 때였다.
설명을 듣고 난 후 VC에서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해자가 뭔가요?"
해자?
혜자?
햬자?
이건 뭐지?
나름 40년 넘게 한국에서 살면서 국어실력, 언어실력은 그래도 꽤 좋다고 자부하면서 살았는데
난생처음 듣는 단어를 들었다.
전략컨설팅에서 일하면서 한국 대기업들과도 정말 많이 일했고, 외국계 기업에서 오래 근무하면서도 온갖 파트너사들과도 일했지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대표가 답을 하는데
답 내용을 가만 듣다 보니 다른 기업이 따라오지 못하게 어떻게 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단어인지 나만 빼고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것 같아
차마 그게 무슨 말인지 물어보지도 못하고
나중에 혼자 몰래 국어사전을 찾아봤다.
'성 주위에 둘러 판 못'
생각해 보니 일본 오사카 여행을 갔을 때 오사카 성 주위에 커다란 물길이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성 주위에 커다란 물구덩이를 빙그르르 파놓고 거기에 물이 담겨있는 것이었다.
아니, 근데 갑자기 왜 기업 설명을 하는데 해자라니?
차후에 좀 더 찾아보니 워런 버핏이 기업의 '경제적 해자'라는 용어를 쓰면서 널리 알려진 말이었다.
회사를 성에 비유하고 다른 경쟁자가 성을 공격하지 못하게 둘러싼 방어막을 해자로 비유하면서
경쟁자로부터 회사를 방어할 수 있는 용어로 쓰이고 있었다.
나만 갖고 있는 데이터, 다른 회사가 모방하기 어려운 기술 이런 게 모두 해자였다.
결국 VC의 질문은 이거였다.
"이 회사가 잘되기 시작했을 때, 다른 회사가 돈과 사람을 들여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나요?"
근데 왜 대기업, 외국계 기업에서는 전혀 쓰지 않던 말을
스타트업, VC업계에서는 이렇게 자주 쓸까?
아마도 그건 작은 스타트업으로서는 더더욱
자본을 앞세운 큰 기업이 자신을 금방 카피할 수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
무언가 자신만을 지키는 전략 같은 것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투자자 입장에서는 이 부분이 투자를 실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 중 하나이기에
그걸 특정 용어로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었을까?
기존에 많이 쓰이는 경쟁우위, 진입장벽, 차별화 등의 용어는
그러한 스타트업의 특수성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을까?
재밌는 것은 중고등학생인 나의 아이들도 이 말을 쓴다는 것이다.
"엄마, 그거 진짜 혜자야."
나는 처음에 그 말을 듣고, 그게 '해자'인 줄 알고
한바탕 해자가 비즈니스에서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 설명했더니
아이 둘이 나를 한참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엄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거 좋다는 뜻이야. 애들 다 그렇게 써."
아....
이번에는 '해자'가 아니라 '혜자'였다.
다시 국어사전을 찾아봤다.
한국 일상표현 사전과 트렌드 사전에 따르면
'가성비가 매우 좋은 것', '가격에 비해 양이나 질이 만족스러움'이라고 쓰여 있다.
배우 김혜자 씨의 이름으로 편의점 도시락이 나왔었는데, 양도 많고 품질도 좋으며 가격까지 착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VC 앞에서는 해자를 몰라서 국어사전을 찾아봤고,
애들 앞에서는 혜자를 몰라서 국어사전을 찾아봤다.
투자자의 세계에서는 투자자의 말을 써야 하고,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아이들의 말을 써야 했던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려면 새로운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한다.
아... 해자든 혜자든, 배움의 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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