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가 늘어날수록 계약서는 누더기가 되는 이유

by신나요

스타트업에서는 투자자가 많아질수록 계약서도 많아진다.

왜냐? 투자자별로 다 계약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 당연히 그럴 수 있지.

동일한 투자 라운드란 같은 시기에 투자를 같이 진행한 경우인데, 투자 시기가 달라지면 투자 라운드가 달라지고, 그럼 투자 조건이 달라져서 계약서가 다르겠지.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같은 시기에 받은 투자 라운드라도 다 다르다. 다 제각각 자기 계약서를 들고 온다.

왜냐고? 계약서 말 하나만 바꿔도 다른 계약서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투자자가 들고 오는 하나의 투자계약서 안에는 여러 내용이 섞여 있다.

당연히 이번 라운드에서 투자받는 조건, 즉 발행가, 주식수, 납입일 등이 적혀 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 투자자가 어떤 주식을 갖게 되는지 - 우선적으로 배당을 받는지, 회사가 매각될 때 투자금을 우선적으로 회수할 권리 등

- 회사 운영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 - 이사를 지명하는 권리, 사전에 회사가 투자자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내용 등

- 주식을 다른 이에게 팔거나 매각할 때 일어나는 우선매도권, M&A나 IPO 시 조항 등

- 창업자나 회사의 주요 이해관계자가 지는 바카라임과 그에 따른 벌을 언급하는 위약벌, 약속을 어겼을 때 하는 손해배상, 그 외 진술과 보장 등

이렇게 여러 내용이 투자조건과 같이 하나의 계약서에 담긴다.


정말 많은 내용이 다 하나의 투자계약서에 담기는 것이다.

그러니 조건 하나만 달라져도 다른 투자계약서가 된다.


"우리 회사는 이 조항이 꼭 필요해요."

"우리는 이 내용은 삭제해야만 해요."

"우리는 이렇게 바꾸지 않으면 투자심의위원회를 통과할 수가 없어요"


물론 회사가 너무너무 잘났다면 "아, 그런 주장하시면 저희는 투자 안 받을게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회사는 대개 돈이 궁하고 투자자 한 명 한 명이 소중하기에

이런 요구사항을 반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투자자들의 요구사항을 반영하다 보면

분명 리드 투자자의 계약서 하나로 다 같이 처음에는 시작했는데

어느새 같은 투자 라운드에 들어온 투자사들의 계약서가 다 달라진다.

그래서 투자 라운드를 2-3번만 돌고, 한 라운드에 투자사가 4-5군데만 들어와도

벌써 열 개가 넘는 계약서가 제각각 존재하게 된다.


문제는 투자계약서의 개수가 아니다.

한 회사의 지배구조워 주주 권리가 여러 계약서에 흩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투자자들은 서로서로의 투자계약서를 못 보니, 나보나 쟤가 더 유리하면 안 되고, 그러니 내가 더 많은 조항을 넣어서 자기 투자사를 보호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 된다.

그러다 보면 계약서는 어느새 누더기가 되어있고,

회사는 서로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열개 스무 개가 넘는 투자계약서를 관리하며 봐야 한다.

너무너무 헷갈린다.


이러다 해외 투자유치나 해외 M&A를 위해 준비하게 되면 문제가 더 분명해진다.

기존 한국 계약서의 주주간계약 내용을 다시 표로 정리하고,

서로 충돌하는 조항이 발견되기도 하고, 왜 특정 투자자에게만 다른 권리가 주어졌는지까지 설명해야 한다.



그럼 해외도 이런가?


엄밀히 말하면 계약서 수가 더 적다고만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성격이 다른 문서는 별개의 문서로 나누고, 주주 간에 공통된 계약서로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경우,

- 투자 라운드마다 투자 조건을 정리한 주식인수계약서 (Stock Purchase Agreement, SPA)

- 우선주의 배당, 청산, 전환 등의 권리가 포함된 정관 (Certificate of Incorporation 또는 Charter)

- 투자자들의 권리를 정리해 둔 투자자권리계약서 (Investors' Rights Agreement)

- 이사 선임과 의결권 행사 방식을 정리한 의결권계약서 (Voting Agreement)

- 기존 주주의 주식 매각에 대한 우선매수, 공동매도권을 정하는 계약서


이렇듯 하나의 계약서에 다 때려 넣기보다는 내용과 성격별로 계약이 쪼개져 있고, 투자자들이 공통으로 자신의 권리와 주식에 대한 권리가 기재된 정관이나 투자자권리계약서는 공유하되 각 라운드마다 별도의 SPA는 존재하는 방식이다.


영국은 좀 더 간단해서 이렇게 정리된다.

- 이번 투자 라운드에 참가하는 투자자들의 지분인수 조건을 정리한 주식인수계약서 Subscription Agreement

- 주주 간 지배구조, 동의사항, 정보권, 주식양도 등을 정리해 둔 주주간계약서 Shareholders' Agreement (SHA)

- 주식 종류별 법적권리, 청산권, 전환권 등을 정리해 둔 정관 Articles of Association


핵심은 같은 거래는 같은 문서로 정리된다는 점이다. 즉 투자라운드 별 주식인수계약은 당연히 조건이 다르니 라운드 별로 별개의 계약이지만, 기존 주주에게 적용되던 투자자권리계약서나 주주간계약서, 정관 등은 새로운 투자자가 들어오면 다시 새롭게 업데이트해서 하나의 새로운 문서로 태어난다.


물론 미국과 영국에서도 특정 투자자에게만 별도의 권리를 주는 사이드레터가 존재하고, 모든 투자자가 언제나 완전히 같은 조건으로 계약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통된 권리는 표준화된 공동 문서에서 관리하고, 투자자별 예외는 예외로 구분한다는 점이 다르다.




다행히 이런 움직임이 2026년 6월 한국에서도 시작되어 벤처투자 표준계약서가 새롭게 나왔다. 핵심은 투자계약서와 주주간계약서를 분리하는 것이다. 투자계약서에는 금번 라운드의 투자조건을 적고, 주주간계약서에는 투자 이후 주주에게 적용될 권리와 의무가 담겨있다.


벤처투자는 몇십 년 전부터 있어왔고, 본격적으로 모태펀드와 한국벤처투자가 출범한 지도 20년이 지났는데, 이제야 투자계약서와 주주간계약서를 분리하는 작업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것이 참 아쉽지만. 그래도 늦게라도 시작되어 잘 정착되길 바랄 뿐이다.


결국 투자는 회사가 성장할 거란 믿음으로 한다. 계약은 그 과정에서 생길 위험을 합리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장치이니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투자자를 보호하는 장치가 지나치게 복잡해져 회사의 의사결정과 후속투자까지 어렵게 만든다면, 앞뒤가 바뀐 격이다. 투자자도 보호받고 회사도 성장할 수 있는 상식적인 투자 환경이 조성되길 기대해 본다.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투자자는 조언하지만, 회사는 바카라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