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에는 할 일이 정말 많다. 근데 할 사람은 없고 돈도 없다.
물론 어느 회사나 일은 많다. 나도 회사에 다닐 때 어느 회사건 항상 일이 많았다. 근데 그래도 보통 좀 연식이 있는 회사에서 일을 하면, 일이 일종의 틀에 담겨서 나온다. 그 틀 안에 있는 일을 하는데 양이 많은 것이다.
스타트업은 다르다. 우선 그런 틀 자체가 아직 없다. 틀을 만들어 나가는 일부터 먼저 시작해야 한다.
틀을 만드는 일은 시간이 곱절로 걸리는 일이다. 시행착오도 많고, 하다가 방향을 틀게 되는 일도 있다.
그게 다 돈이고 시간이다.
그리고 틀이 없다 보니, 오히려 모든 게 다 가능하다.
반대로 돈이 없다. 그러니 돈이 되면 다 해야 할 것 같다. 지금 내가 하는 일과 연관되어 보이는 일들도 많고, 그것만 하면 당장 들어올 수 있는 돈이 보인다.
그러니 어떻게 해?
시간과 사람을 갈아 넣는다.
시간과 사람을 갈아 넣으면 돈이 조금은 나온다.
하지만 결국 사람이 지쳐서 떠나고, 정말 내가 하려고 했던 일에 쓸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
그러다 보면 '뭘 하려고 사업을 시작했지?' 싶어진다.
한국에 있는 스타트업 중에 정부 과제 안 하는 스타트업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정부는 많은 돈을 들여서 스타트업을 육성하고자 한다. 정말 좋고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정부과제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정부과제의 문제점을 금방 알 것이다.
그게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일인지.
물론 공짜로 나라돈 쓰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정부과제는 대개 급한 일정으로 공고가 나서, 그걸 따내기 위해서는 밤을 새우면서 한참을 일해야 한다. 운이 좋아서 선정이 된다면, 그 후에도 과제를 해 나가면서도 수많은 보고와 회계정산이 뒤따른다. 오죽하면 정부과제 담당자를 별도로 두는 조직들도 많을까.
나는 스타트업에 조인하고 반년동안 10명 미만의 조직원들이 얼마나 정부과제에 매달려서 많은 시간을 쓰고 있고, 정산과 보고로 힘들어하는지 봤다.
그리고 결국 일정 금액 미만의 정부과제는 지원조차 하지 않기로 모두를 설득했다. 대신 비용 리뷰를 통해 최대한 비용을 다시 줄이고, 정부과제에 쓴 시간을 본업에 더 집중해서 쓰기로 정리했다.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해외사업이 중요한 것은 모두가 안다.
그러다 보니 조금이라도 입질이 오는 해외 시장은 다 벌려놓기 마련이 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돈은 안 들어오는데 일은 계속하게 되는 해외 여러 국가들이 많이 생겨난다.
그 시장에서 정말 돈을 다 벌 수 있을까?
그것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나는 해외 시장도 미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접어두기로 했다. 사실 유럽에서도 이미 얘기하고 있는 부분도 있었고, 아시아도 찔끔찔끔 무언가를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해당 업무를 하고 있던 직원들은 사실 이런 결정이 내려지면 사기가 저하될 수 있다. 내가 하던 업무가 중요하지 않다고 회사가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셈이니.
하지만 그들도 결국 집중해서 한 시장에서 성과를 내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더 사기를 높일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다.
스타트업에는 항상 돈, 사람, 시간이 부족하다.
돈이 없으니 사람과 시간을 쏟아서 돈을 어떻게든 벌어 오는 게, 가장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길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 중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람과 시간이다.
돈은 투자를 받거나 다른 방법으로 외부에서 조달이 가능하지만, 사람은 만들어내야 하고 시간은 만들어낼 수조차 없다.
그러니 스타트업에서는 돈보다 사람을 아껴야 하고, 사람보다 시간을 아껴야 한다.
결국 내가 나아갈 길을 정한 이후에 중요한 것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도 있지만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도 모른다.
정부 과제를 하지 않는 것.
지금 당장 돈이 될 것 같아도 하지 않는 것.
해외 시장이라고 무조건 하지 않는 것.
하던 일이라고 계속 가져가지 않는 것.
스타트업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러니 오히려 하지 않을 일을 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