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2026년 4월 27일
"누나. 제가 S사에 입사하는 걸 목표로 하지는 않았지만요.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회사가 S사였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S사에 입사했더라면 분명 기분이 엄청 좋았을 거예요.
그런데요. 이번에 S사에서 총파업을 하고 있잖아요. 만약 제가 진작 입사를 했더라면, 저도 그 자리에 있지 않았을까요? 길거리에 앉아서 연봉을 높여 달라, 성과급을 달라 하면서 피켓을 들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며 들어갔을 텐데도요.
그런 모습일 걸 아니까 제 자신이 너무 싫은 거 있죠. 그러다 보니 요즘은요.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고민하고 있어요. 그래도 좋게 봐주신 회사가 있어 반도체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이 길이 아니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는 반도체가 아니면 안 된다고만 생각했었거든요. 오히려 이 길이 아니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도 들어요. 요즘은 그런 상태예요."
#2026년 8월
몇 달 전, S사의 F사업부에 입사한 친구의 입에서 나온 '자격지심'이라는 네 글자를 계속 생각해 왔다. F사업부가 아닌 M사업부에 지원해 입사했더라면 훨씬 많은 성과급을 받을 수 있었을 테니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발언이었다.
'자격지심' 네 글자가 생각날 때면, 그가 S사에 최종 합격해 전화기 너머로 들뜬 목소리를 들려주었던 밤도 함께 떠오르고는 했다.
긍정적이고 열정적이던 면을 닮고 싶어 오래도록 동경했던 그였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올해 초에 근황을 나눈 그는 그저 맥주 한 캔으로 하루를 마무리 짓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랬다.
나는 여전히 그가 지녔던 청명함을 섬세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그는 찬란했던 자신의 모습을 잃고 잊은 듯했다.
다음 달이면 S사의 채용 공고가 열릴 터였다. 9월부터 국토대장정을 떠날 생각이었지만, 그럼에도 지원은 하는 게 맞나 생각했다. 지원을 한다면, 역시 M사업부가 아닌 F사업부를 타겟팅 할 생각이었다.
#2026년 10월 2일
임실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해오다가, 마침 여유가 된다던 승훈이와 시간을 맞춰 임실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 우연히 사선문화제 축제 현장을 방문했는데, 광장이 꽤나 넓은 것을 알게 된 승훈이가 슬러시를 사들고 돌아다닐 것을 제안했다.
슬러시를 판매하는 천막에 들려 금액을 물었더니 잔 당 4천 원이랬다. 속으로 '내가 어릴 땐 500원이었는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승훈이가 먹고 싶다 했으니 구매를 주저하지는 않았다.
슬러시를 먹으며 걷고 있는데, 승훈이가 "형, 이 정도면 엄청 개꿀 아니에요? 4000원에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게 어디예요."라고 말했다. 슬러시를 빠르게 들이켰을 때보다도 머리가 띵했다.
이러한 사건들이 연쇄된 탓에, 삶, 일, 행복과 같은 가치관에 대한 고찰이 장기간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국토대장정을 꼭 떠나야만 하겠더라.
덕분에 삼단 논법에 근거해 '국토대장정을 떠나기 위해 퇴사를 했습니다!'라는 명제가 성립하게 돼 버렸지만. 엄밀하게는 계약직으로서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퇴사하겠다 했을 뿐이기는 하지만, 하반기에 국토대장정을 떠나려 이직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던 나였으므로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진지하게 고민했다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큰 문제가 있다. 그건 바로 내가 축구공을 세네 번만 걷어차도 퉁퉁 부어 절뚝이게 되는 반영구적 발목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니 발목의 상태에 따라 하루 만에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불행 중 다행히 3년 전 한강을 따라 34km를 쉬지 않고 걸었다 며칠을 절뚝였던 과거가 있으므로 물리적인 한계를 어림잡을 수는 있을 것이다. 어차피 천천히 돌아다니려 했으니, 잘 됐지 뭐.
구상 중인 소설의 배경이 바다이므로 강릉부터 부산까지 걸어보면 되겠다고만 결정 지은 대바카라 없는 여행에서, 과연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신체적 앓음, 닳음이, 정신적 아름다움으로 개화하기를 바라며, 강릉역에서 첫 발을 내디뎌 본다.
- 알림 사항 -
1. 이 기록은 에세이로서의 완벽을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감정을 나열하듯 기록하고자 끄적인 흔적이므로, 읽기에 부자연스러운 문장들이 있습니다만 굳이 정성을 들여 수정하지는 않았습니다.
2. 이 기록을 공개적으로 작성해 봐야겠다고 판단을 내린 게 1일 차의 저녁이었어서, 1일 차까지는 내용이 중구난방 합니다.
3. 이 기록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이름은 당사자들로부터 본인이 작성하는 에세이에 당신의 실명을 언급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기입했습니다. 참고로 원래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려 했던 에세이는 다른 작품이었습니다만, 실질적인 여러 한계들로 인해 해당 작품의 끄적임은 중단했습니다.
4. 본문에 가볍게 언급했듯 여행의 목적 중 하나는 소설에 활용할 소재를 구하기 위함이라, 언젠가 익숙한 느낌의 글을 다시 읽게 될 수도 있음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