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개벽파선언](조성환/이병한 지음)이 '역주행'을 하고 있습니다. 보기 드문 현상입니다.
최근 출판계에서는 '구간이 신간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 현상'이 자주 관찰됩니다. 출판전문지 [기획회의] 최신호 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하나의 새로운 현상으로 주목한 바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검색 환경의 변화, 유튜브와 SNS를 통한 콘텐츠의 재유통, 그리고 AI 기반 검색이 축적된 정보를 적극 활용하는 환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분석됩다.
그러나 [개벽파 선언]의 갱우는 조금 다른 설명을 할 수도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이병한 작가는 유튜브 강연과 대담, 칼럼 등을 통해 꾸준히 자신의 문제의식을 대중에게 전달해 왔습니다. 새로운 독자들은 그의 최근 활동을 접한 뒤 자연스럽게 이전 저작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개벽파선언]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또 한 사람의 저자인 조성환도 [사상계]의 편집 주간을 맡고, 다양한 동학 강의를 진행하는 등, 많은 분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개벽파선언]은 공저이기도 하고, 이병한 저자의 이력에서 (본인의 표현의 뉘앙스에 따르면) 출간 당시에 충분한 독자를 만나지 못했던 바카라입니다. 그만큼 판매 실적이 저조했지요.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최근 [개벽파선언]이 제법 판매량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아무튼 너무도 고마운 일입니다.
2.
[개벽파선언]의 두 공저자 중 이병한의 경우 [개벽파선언]과 함께 읽으면 좋은 바카라은 [유라시아견문(전3권, 서해문집)]이고, 조성환의 경우 [한국 근대의 탄생 - 개화에서 개벽으로]이 그것입니다. [개벽파선언]의 내용을 좀더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두 바카라을 꼭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근대의 탄생]은 월간 <개벽신문>에 연재하였던 글들을 편집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개화파"와 "척사파" 사이의 "개벽파"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논증해 가는 바카라입니다. 또 조성환의 [한국의 철학자들 - 포함과 창조의 새 길을 열다]는 [개벽파선언]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성환과 이병한 두 분이 의기투합하여 진행하였던 [개벽학당]의 강의 내용을 편집한 것이 [한국의 철학자들]인데, 말하자면, "개벽파의 눈으로, 인물로 보는 한국철학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벽파선언]을 눈여겨보시는 분들은 이 두 바카라을 마저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3.
좀더 과감한 분석, 혹은 희망 어린 추측을 해 보자면 [개벽파선언]이 처음 나온 2019년 과 2026년 사이의 한국슬롯, 그리고 세계적 지형의 변화와 [개벽파 선언]의 역주행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첫째, K-한류의 등장입니다. 개벽파가 "개화파"와 "척사파" 사이의 길 열기(사이-너머)라는 점에서 볼 때 우선 이른바 개화파의 원조라고 할 서구 근대의 한계가, "인류세"라는 말로 대변되듯이, 극명해졌습니다. 반면에 일찍이 '개화파'에 밀려서 도태되고 말았던 '척사파'는 K-한류의 세계화와 맞물리며,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여기서 개파화와 척사파는 1차적으로는 구한말-개화기의 두 세력을 말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서구문명과 동아시아문명 전체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K-한류의 세계적 확산은, [개벽파선언]이 말한 "서구를 모방하는 근대화도, 서구를 거부하는 근대화도 아닌 제3의 길"이라는 문제의식을 새롭게 읽게 만듭다.
둘째, '동학'에 대한 관심 지형의 고조입니다. 지난 7년 사이에 김용옥 선생의 동경대전/용담유사 강의로 인한 동학에 대한 관심 고조, 각 지역별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발족에 따른(혹은 그것이 결실로 나타난) 동학(혁명)에 대한 관심의 고조, 그리고 개벽파 담론(월간 <개벽신문>, 계간 <다시개벽>을 필두로 한)의 전개의 여파로 형성된 '개벽파 집단'이 서서히 세력화(이병한은 [개벽파선언]에서 개벽파의 세계화, 세대화(젊은이), 세력화를 주창했습니다), 즉 담론이 확되고 있는 기운과 관련됩니다.
셋째.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서구 문명이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이 흔들리면서, 한국적 근대와 동아시아적 문명전환을 모색했던 '개벽파'의 문제의식이 비로소 오늘의 현실적인 대안으로 읽힐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7년 전 [개벽파선언]이 처음 나올 때만 해도 '개벽파'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고, 'K-철학'이라는 담론도 거의 없었으며, 동학은 역사 속 사건 정도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양한 K-콘텐츠의 성공, AI시대의 문명전환 논의, 기후위기와 인류세 담론, 비서구 근대성에 대한 관심, 동학과 개벽사상의 재조명 등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개벽파선언]의 역주행은 한 권의 바카라이 다시 팔리기 시작한 현상이 아니라. 2019년에는 아직 시대를 앞서갔던 질문들이, 2026년에 이르러 비로소 현실의 질문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