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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온기와 여유

빛이 고이는 문장, 침묵이 피어나는 자리

by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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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마루 끝까지 얕게 밀려드는 오후다. 창가에 드리워진 하얀 커튼은 미세한 바람에도 가볍게 흔들리며 마루 위에 눈부신 무늬를 새겨 넣는다. 그 빛이 닿는 곳마다 덩그러니 놓인 유리병 속 하얀 들꽃이 맑은 생기를 뿜어내고, 바닥에 가지런히 쌓인 바카라 무더기는 시간의 속도를 늦추는 듯 고요한 무게감을 더한다.


우리는 늘 거창한 성취나 뜨거운 열정만이 삶을 지탱해 준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순간에도, 멈추면 뒤처질까 봐 불안을 연료 삼아 스스로를 채찍질하곤 했다. 하지만 이 작은 공간, 바쁘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한 발짝 물러선 자리에는 전혀 다른 결의 풍경이 펼쳐진다.


아무런 목적 없이 쌓아둔 바카라장을 넘기지 않아도 좋고, 유리병 속 이름 모를 풀잎이 건네는 바람결을 가만히 느끼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충분히 부유해진다. 볕이 가장 잘 드는 나무 바닥에 앉아 그림자의 이동을 지켜보는 일, 그저 차 한 모금을 천천히 삼키는 일 속에는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스며드는 온기가 있다.


여유란 모든 것을 완벽하게 끝마친 뒤에야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엉킨 마음을 풀어내고, 내게 허락된 지금 이 순간의 볕과 바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태도에 가깝다. 거창한 다짐이나 의미를 붙이지 않아도, 하얗고 소박한 빛 아래에서 숨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온전한 채움이 된다.


창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서늘한 기운을 밀어내고 포근함을 남길 때, 바카라 한 권을 펼치지 않아도 마음속 페이지는 이미 따스한 문장들로 가득 차오른다.


햇살은 언제나 비스듬히 낮아질 때 비로소 제 정체를 드러낸다. 직사(直射)의 명징함이 세상을 계량하고 재단하는 동안, 사선으로 넘어오는 빛은 마루의 나뭇결마다 품고 있던 아늑한 음영을 깨운다. 창틀을 베고 누운 하얀 커튼의 올 사이로 미세하게 부서진 햇살 알갱이들이 투명한 유리병에 도달할 때, 그곳에는 작은 정적이 수액처럼 고인다.


이름 모를 들꽃의 줄기는 빛의 경로를 기억하려는 듯 미세하게 굽어 있다. 그 소박한 꽃잎들이 공기 중에 늘어뜨린 그림자는, 어쩌면 우리가 지나온 문장들보다 더 많은 언어를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어란 얼마나 자주 삶의 본질을 비켜가는가. 정갈하게 쌓인 바카라들의 두꺼운 등표지 너머로 단어들이 가만히 숨을 죽인다. 읽히지 않은 바카라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침묵이며, 그 침묵은 창가에서 시작된 온기와 닿아 비단처럼 부드러운 여백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늘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서 간다. 빽빽한 문장으로 삶을 촘촘히 메우려 애쓰고, 지나쳐 가는 시간 위에 거창한 이름을 붙이려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삶의 진짜 감각은 그렇게 거대하고 뜨거운 곳이 아닌, 이처럼 서늘한 나무 바닥 위로 내려앉은 무늬 속에 숨어 있다. 볕의 온도가 바닥의 결을 따라 천천히 옮겨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 그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옥죄던 수많은 목적과 당위로부터 무거웠던 짐을 놓아버린다.


바람이 커튼의 자락을 살포시 끌어당기자, 공간에 유영하던 빛과 그림자가 아주 짧은 춤을 춘다. 그것은 아무런 자국도 남기지 않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궤적이다. 굳이 마음에 담아두려 애쓰지 않아도, 가슴 깊은 곳에서 어떤 투명한 안도가 밀물처럼 밀려든다.


소박함이란 비어 있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소란을 거르고 남은 정밀(靜謐)의 정수라는 것을, 창가의 이 조용한 햇살이 말없이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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