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향(香)

소멸이 남긴 가장 은밀한 고백

by구시안
구시안 홍대.jpg

향은 형체가 없다.

다만 공기라는 투명한 비단 위에

가장 은밀한 붓질로 그리어지는

어느 사라진 계절의 이면(裏面)일 뿐.


길가를 스치는 한 줄기 바람 속에

낯선 문장처럼 불쑥 솟아오르는 향나무의 피,

그것은 잊혀진 이름이 입술에 닿기도 전에

폐부 깊숙이 밀려드는 옛 기억의 묵직한 조종(弔鐘).


눈으로 세상을 가두고

손으로 사물을 소유하려 하지만,

향은 가두어지지 않는 영혼의 습기처럼

피부의 미세한 모공을 지나

영원의 안쪽으로 가만히 틈입한다.


어느 비 내리는 가을밤,

젖은 흙이 피워 올리는 미세한 숨결 속에

세상의 모든 태어남과 소멸이 한꺼번에 깃들고,

오래된 고서(古書)의 바랜 종이 냄새 속엔

이미 한 바퀴를 돌고 간 타인의 번민이

고요한 먼지로 스며 있다.


향은 잡으려 할수록 흩어지고,

밀어내려 할수록 더 깊이 침전하는 것.

삶이라 부르는 모든 덧없는 것들이

지상에 남기고 가는 마지막 눈물, 혹은 고백.

마침내 바람마저 그 숨을 거두는 날,

향은 몸을 흘러나가는 마지막 영혼처럼

아무런 자국도 남기지 않은 채

우주라는 커다란 공백 속으로 조용히 귀환할 것이다.


그렇게 향이 지난 자리에 홀로 남아 숨을 고르는 동안, 세계는 비로소 소음 너머의 깊은 침묵을 드러낸다. 눈으로 포착할 수 있는 만물은 시간이 지나면 여락하고 부서지지만, 미처 이름을 붙이지 못한 향기의 파편들은 기억의 정물화 속에 오래도록 고여 머문다.


문득 길모퉁이에서 스쳐 간 알 수 없는 향기 하나에 발걸음을 멈추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그것은 지나온 어느 생의 모서리에 두고 온 슬픔의 감촉이자, 굳게 닫혀 있던 영혼의 문을 두드리는 비밀스러운 기호다. 잡을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향을 좇는 일은 어쩌면 지상에 잠시 머물다 가는 모든 존재가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을 아름다움을 그리워하는 거룩한 방황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자국도 남기지 않은 채 스러지는 향의 귀환을 바라보며, 삶이란 결국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투명하게 비워냄으로써 거대한 우주의 공백과 마주하는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바람이 스쳐 간 자리마다 나지막이 스며드는 그 은밀한 고백을 품은 채, 다시 조용히 다음 계절의 문턱을 넘는다.





이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작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저작물을 공유, 게재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brunch membership
구시안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자각(自覺). 나의 시들지 않는 문학이라는 꽃잎을 위해. brunch + 356日.

1,694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138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224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27화사물에게도 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