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댈 곳이 없는 것들을 위하여
녹슨 문고리를 잡을 때마다 나는 한 시대의 체온을 느낀다. 열리고 닫히며 닳아간 놋쇠의 피부 위로 얼마나 많은 서성임과 주저함이 다녀갔을까.
우리는 흘러가는 시계의 바늘만을 시간이라 부르지만,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켜낸 사물들은 시간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겹으로 시간을 쌓아 올린다. 찻잔 바닥에 자욱하게 남은 은은한 찻물 흔적은 지난 계절 유난히 길었던 어떤 대화의 지층이고, 바카라장의 주름진 모서리는 어느 번민하던 밤, 타인의 사유를 부지런히 베껴 적던 손가락의 아늑한 무덤이다.
사물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를 조금씩 닳아 없앰으로써 자신을 스쳐 간 인간의 삶을 기어이 기록할 뿐.
버려진 의자 다리의 파인 흠집 속에, 빛바랜 거울에 오랫동안 상주하던 아침의 고요 속에, 이미 완성된 시간들이 우주처럼 숨 쉬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마침내 떠나고 없을 때에도 그들이 간직한 우리의 기쁨과 슬픔은 햇살의 먼지처럼 공기 중에 부유하며, 사물이라는 오래된 목격자의 이름을 빌려 세상의 마지막 장을 나지막이 낭독할 것이다.
사람들은 오래된 것에 녹이 슨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이 늘 이상했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뜻이고, 녹이 슨다는 것은 그 시간 동안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두 가지를 너무 쉽게 같은 말로 취급한다. 마치 시간이란 모든 것에 똑같이 흐르고, 오래된 것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것을 견디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그러나 쇠는 시간을 견디지 않는다. 견딘다는 말에는 견디는 동안의 고통과 그것을 통과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쇠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쇠는 비를 맞고, 물기를 머금고, 공기와 반응한다. 어느 날 표면에 붉은빛이 나타난다. 쇠가 견디기로 결심한 적도,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쓴 적도 없는데 우리는 그것을 두고 쇠가 오랜 세월을 견뎠다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사물의 변화보다 변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신의 습관을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래된 물건을 보면 사람들은 그 물건이 지나온 시간을 상상한다. 손때 묻은 바카라에는 누군가의 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닳아 버린 계단에는 수많은 발걸음이 쌓여 있다고 말한다. 문고리의 광택은 오랜 사용의 증거가 되고, 깨진 찻잔은 어떤 부주의나 불운을 상상하게 한다. 우리는 사물을 보면서 그곳에 없는 사람들을 불러낸다. 사물이 말하지 않는 것을 대신 말하고, 사물에 남은 변화를 누군가의 이야기로 번역한다.
그렇게 하면 사물은 이해하기 쉬워진다. 무엇이 그것을 바꾸었는지, 왜 그런 모습이 되었는지, 그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명이 끝난 뒤에도 사물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우리의 해석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붙인 이름과는 무관하게.
나는 그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조금 낯설어진다.
가령 오래된 의자가 하나 있다고 하자. 앉는 부분은 움푹 들어갔고, 등받이의 칠은 벗겨졌으며, 한쪽 다리는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다. 우리는 그 의자에 앉았던 사람을 떠올린다. 오래전 그 집에 살았던 가족이나,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누군가를 생각한다. 의자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의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다.
사람이 앉았던 자리가 내려앉은 것은 목재가 오랜 시간 하중을 받았기 때문이고, 칠이 벗겨진 것은 마찰과 습도, 빛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의자에는 과거가 남아 있지만, 과거를 회상하는 능력은 남아 있지 않다. 그 차이를 우리는 종종 잊는다. 기억하는 자와 흔적을 가진 자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에게도 과거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한다. 과거라는 말은 대개 현재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자리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의 자신과 이전의 자신을 구별하면서 과거를 말한다. 지나간 일을 기억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상상하며, 때로는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는지가 더 중요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물의 변화는 우리의 기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돌에도 풍화의 시간이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만들어진 유리에도 빛과 열이 지나간 역사가 있다. 내가 버린 물건은 내가 그것을 잊었다고 해서 변화를 멈추지 않는다. 어딘가에 놓인 채 먼지를 뒤집어쓰거나, 습기를 머금거나, 다른 물질과 접촉하며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내가 더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물건의 현재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의심할 때보다, 인간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세계가 계속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더 깊은 고독을 느낀다.
우리는 사라지는 것을 슬퍼한다. 누군가 죽으면 그가 더는 이 세계를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슬퍼하고, 어떤 장소가 사라지면 그곳에 남겨 둔 자신의 시간도 함께 없어지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세계는 우리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사랑했던 장소는 다른 사람의 장소가 되고, 우리가 사용했던 물건은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거나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 남겨질 것이다.
그 물건들은 우리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물이 우리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리가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흔적은 기억하는 자가 없어도 남는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남지 않을 뿐이다. 우리가 남긴 것은 우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가 우리를 통과하며 달라진 방식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남기는 일일까.
나는 오래된 집에서 창틀을 본 적이 있다. 창문 아래쪽의 나무는 오랫동안 물기를 머금었는지 색이 짙었고, 모서리에는 칠이 벗겨진 자리가 있었다. 누군가 그곳에 화분을 두었을 수도 있고, 비가 들이치는 날마다 창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짙어진 나무와 벗겨진 칠뿐이었다.
그 앞에 서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물의 변화에는 언제나 원인이 있지만, 그 원인이 반드시 이야기로 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흔적을 보면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일 앞에서는 이유를 상상하고, 설명되지 않는 변화 앞에서는 설명을 찾아 나선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상태를 견디기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은 설명되지 않은 채로도 존재할 수 있다. 창틀은 누가 화분을 두었는지 알지 못해도 짙어질 수 있고, 돌은 누가 그것을 밟았는지 알지 못해도 닳을 수 있다.
모든 변화가 누군가에게 이해되어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사실이 이상하게 위안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겪은 일들 가운데는 끝내 설명되지 않을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왜 어떤 만남은 오래 남고 어떤 만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지, 왜 어떤 상실은 시간이 지나며 옅어지고 어떤 상실은 오래전의 일인데도 오늘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지,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몸은 변하고, 계절은 바뀌고, 우리가 머무는 장소는 조금씩 달라진다.
어쩌면 이해는 변화의 조건이 아니라, 변화가 지나간 뒤 우리가 그것을 따라잡으려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사물에게도 시간이 있다.
이 문장은 사물이 인간처럼 시간을 느낀다는 뜻이 아니다. 사물에게도 저마다의 속도로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이며, 그 변화가 반드시 인간의 경험을 중심으로 설명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나무가 자라는 시간과 유리가 풍화하는 시간은 다르고, 종이가 빛을 받아 누렇게 변하는 시간과 돌이 깎여 나가는 시간도 다르다. 어떤 변화는 한눈에 보이고, 어떤 변화는 한 생애를 들여다보아도 알아차리기 어렵다.
우리는 너무 짧은 시간 동안 살아가기 때문에 느린 변화를 없는 것으로 여기곤 한다.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들은 어쩌면 우리의 눈앞에서 충분히 빠르게 변하지 않는 것들일 뿐이다.
오래된 철문을 다시 본다. 표면에는 여전히 녹이 남아 있다. 나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도 있고, 낡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녹을 닦아 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대로 두어도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어떤 판단을 내리든 쇠에서 일어난 변화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동안 그 앞에 서 있다가 돌아선다.
내가 떠난 뒤에도 철문은 그곳에 있을 것이다. 밤이 오고, 기온이 내려가고, 이슬이 맺혔다가 마를 것이다. 언젠가 문이 교체된다면 그것은 더는 그 자리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조차 쇠에 일어난 변화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거나, 잘게 잘려 다른 물건의 일부가 되거나, 마침내 우리가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남을 수도 있다.
나는 그 이후의 일을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보지 못하는 시간도 시간이라는 것, 내가 알지 못하는 변화도 변화라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철문에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그것은 내가 떠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내가 그 앞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알지 못한다. 내가 붙인 의미는 나와 함께 떠나지만, 쇠의 표면에 일어난 변화는 남아 있다.
어쩌면 사물의 시간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시간과 갈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나간 일을 기억함으로써 시간을 살아가지만, 사물은 지나간 일이 남긴 상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어느 쪽이 더 오래 지속되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도 충분히 오래 살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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