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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우커스 : Glaucous

사라지지 않기 위해 흐려지는 것들

by구시안
글라우커스(Glaucous.png


푸른빛과 회색빛이 섞인 색으로, 표면에 옅은 청록색과 은빛이 감돌아. 물방울이 맺힌 짙은 청회색은 서늘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Glaucous.

식물 표면에 나타나는 희끄무레한 청회색의 왁스질 피막. 정확히 말하면 색이라기보다는 막에 가깝다. 어떤 사과의 껍질에는 희끄무레한 왁스질 피막이 형성된다. 사람들은 그것을 과분이라고 부른다. 손으로 문지르면 옅어지고, 문지른 자리는 이전보다 짙고 선명해진다. 마치 사과가 본래 감추고 있던 색을 이제야 보여 주는 것처럼.


그러나 나는 그 색을 볼 때마다 반대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본래의 색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사과의 본래 모습일까. 아니면 사과가 바깥의 세계와 만나는 방식 가운데 하나를 우리가 본래라는 이름으로 선택한 것일까.


글라우커스. 이 색에는 조금 이상한 사정이 있다.

푸른색이라고 하기에는 회색이 많고, 회색이라고 하기에는 푸른 기운이 깊다. 희미한 녹색이 그 아래를 지나가지만 녹색이라고 부르는 순간 다른 색이 되어 버린다. 어느 하나의 이름에 온전히 머무르지 못하는 색. 빛을 받으면 은빛으로 옅어지고, 그늘에 놓이면 바다의 밑바닥처럼 어두워진다. 그것은 사과의 색이면서 동시에 사과 위에 얹힌 막의 색이다.


나는 그 경계가 마음에 든다.

사물에는 때때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것 사이에 명확한 선이 없다. 사과의 껍질은 사과의 일부이지만, 껍질 위에 형성된 피막은 어디까지 사과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이게 한다. 그것은 사과에서 비롯되었고 사과를 위해 존재하지만, 사과의 과육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깥을 상대한다. 내부의 수분이 쉽게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고, 표면이 외부의 환경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줄인다.


사과는 자신과 세계 사이에 아주 얇은 거리를 만들어 놓는다.

그 거리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사과를 손에 들었을 때, 빛이 그 표면에서 반사되는 순간에, 비로소 그 존재가 드러난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표면에 희미한 안개가 내려앉은 듯한 색이 생긴다. 나는 그 색을 글라우커스라고 부르는 일이 좋다. 색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이전에는 그저 푸르스름하다고 여겼던 것이 하나의 존재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름을 얻었다고 해서 그것이 더 잘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글라우커스라는 말을 처음 듣는 사람에게 이 색을 설명하려면 나는 다시 다른 색들을 불러와야 한다. 푸른 회색, 흐린 청록, 은빛이 섞인 녹색.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다. 설명을 보태면 보탤수록 색은 조금씩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 결국 나는 사과를 보여 주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다. 이름은 색을 가리킬 수 있지만, 색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어떤 것들은 그렇게만 알려질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정확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다른 것이 되어 버리는 것도 있다. 글라우커스는 후자에 속한다. 멀리서 보면 사과 전체를 감싸는 푸른빛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수많은 작은 점과 굴곡, 빛의 반사와 그림자로 나뉜다. 더 가까이 다가가면 색이라는 말조차 충분하지 않게 된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색이 아니라 표면이며, 표면이 아니라 빛이 머무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사과는 그저 거기에 놓여 있다.

나는 사과가 자신의 색을 알고 있는지 생각한다. 물론 사과는 자신이 어떤 색인지 모른다. 누군가가 아름답다고 말해 주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다른 사과보다 특별해 보이기 위해 푸른빛을 더 깊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것은 익어 가는 동안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선택하지 않는다. 표면에 피막이 형성되고, 빛이 반사되고, 주변의 온도와 습도에 따라 수분의 상태가 달라진다. 우리가 색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모든 조건이 만나는 자리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자리에 의미를 가져다 놓는다.

어떤 색은 젊음이라고 불리고, 어떤 색은 늙음이라고 불린다. 붉은색은 생생하고 푸른색은 차갑다고 말한다. 흰색은 깨끗하고 회색은 빛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색을 바라보면서 사물의 상태뿐 아니라 사물이 어떤 상태에 있어야 하는지까지 판단한다. 색을 설명하는 것 같지만, 실은 색을 통해 세계의 질서를 정하고 있는 것이다.


글라우커스는 그 질서에 쉽게 들어가지 않는다.

이 색은 익었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증명하지도, 아직 익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도 않는다. 신선함과 쇠락 가운데 어느 한쪽을 가리키지 않는다. 푸른빛은 살아 있는 것의 색이면서 때로는 죽은 것의 색이고, 회색은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타나지만 빛이 가장 부드럽게 머무는 자리에서도 나타난다. 글라우커스는 그 사이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나는 그 모호함을 미완성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해하려 할 때 그것을 가능한 한 명확하게 구분하려 한다.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이 아닌지,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지 알아야 안심한다. 이름을 붙이고, 분류하고, 설명한다. 그러고 나면 사물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물은 우리가 이해한 만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설명이 끝난 자리에서도 사물은 설명되지 않은 나머지를 품고 있다.


글라우커스는 내게 그 나머지를 생각하게 한다.

사과를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푸른색과 회색의 경계가 흐려진다. 빛이 이동하면서 표면의 일부가 밝아지고, 조금 전까지 어둡던 곳이 은빛으로 바뀐다. 사과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색은 달라졌다. 나는 처음에 본 색과 지금 보는 색 가운데 어느 쪽이 진짜인지 결정할 수 없다. 둘 다 같은 사과에서 나타났고,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를 거짓으로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색이란 사물에 고정되어 있는 성질이 아니라 사물과 세계가 잠시 합의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글라우커스는 사과의 색인 동시에 빛의 색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내 눈의 조건이기도 하다. 사과만으로는 이 색이 생기지 않고, 빛만으로도 생기지 않으며, 내가 바라본다는 사실만으로도 생기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이 한자리에 놓였을 때 나타난다. 내가 자리를 옮기면 달라지고, 빛이 사라지면 달라지고, 피막이 문질러져 없어지면 다시 달라진다.


그런데도 나는 그 색을 글라우커스라고 부른다.

사라질 수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어쩐지 이상하다. 이름은 대상을 오래 붙잡아 둘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이름이 불리는 동안에도 대상은 달라진다. 사과는 익고, 표면의 수분은 줄어들고, 피막은 손에 묻거나 마찰로 벗겨진다. 어제 보았던 색을 오늘 다시 찾으려 해도 똑같은 모습으로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 이름은 남아 있지만 이름이 가리키는 모습은 이미 지나가고 있다.


나는 그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이름을 붙이는 일이 사물을 소유하는 방법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을 잠시 바라보는 방법일 수 있다고 느낀다.


사과를 손에 든다. 표면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다. 물방울 하나가 빛을 모으고, 그 아래의 푸른빛은 조금 더 짙어진다. 물방울은 사과의 색을 바꾸지만 사과의 일부가 되지는 않는다. 잠시 머물다가 흘러내리거나 증발할 것이다. 사과는 물방울이 떠난 뒤에도 남아 있겠지만, 그때의 색은 지금과 다를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사과는 여전히 푸르고, 표면은 여전히 매끄럽다. 그러나 내가 손으로 잡았던 자리에는 아주 미세한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다. 피막이 조금 문질러졌을 수도 있고, 손의 온기가 표면에 잠시 전달되었을 수도 있다. 나는 그 변화를 확인하지 않는다. 확인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모든 변화가 반드시 눈에 보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름답다고 말해 달라고 하지 않았고, 오래 기억해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색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다. 내가 사과 앞에 머무는 동안 사과는 사과로 존재했다. 내가 돌아선 뒤에도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그것이 나를 위해 만들어진 색이 아니라는 사실, 내가 알아보지 못해도 사라지지 않는 색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가라앉힌다.


나는 오랫동안 색이란 사물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색은 사물 안에만 있지도 않고, 사물 바깥에만 있지도 않다. 그것은 사물이 세계와 접촉하는 자리에서 나타나며, 그 접촉은 매 순간 달라진다. 사물은 자신의 색을 소유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조건 아래에서 특정한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다.


글라우커스는 그런 색이다.

푸르다고 하기에는 너무 흐리고, 회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으며, 녹색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멀리 떨어져 있다. 어느 한 이름에 온전히 속하지 않으면서도 그 모든 색의 기척을 품고 있다. 나는 그 색을 바라보며 사과가 무엇인지보다, 사과가 어떻게 지금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문득, 사과를 이해한다는 것이 사과의 모든 것을 알아내는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해란 사물에게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빼앗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름을 붙이되 이름 안에 가두지 않고, 바라보되 바라본다는 이유로 그것을 모두 안다고 믿지 않는 일. 사과가 사과인 채로 남을 수 있도록, 내가 모르는 부분을 그대로 남겨 두는 일.


사과의 표면에서 푸른빛이 천천히 옅어진다. 해가 기울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 전의 색을 기억하려 하지만 기억 속의 사과는 이미 다른 빛을 받고 있다. 글라우커스라는 이름은 그대로인데,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과는 조금 전의 사과가 아니다.


나는 이 색을 입힌 사과를 다시 바라본다.

이번에는 색을 알아맞히려 하지 않는다.

그저 사과가 지금 여기에서 어떤 빛을 받고 있는지, 그 빛이 표면에 어떻게 머물다 사라지는지 지켜본다. 사과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침묵이야말로 내가 사과에게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정확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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